몽마르트르 인근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전경]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지만 해발 180m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걸어서 올라가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아야 하는 곳이다. 시간이 촉박한 사람이나 몸이 불편할 경우에는 지하철 티켓을 이용할 수 있는 후니퀼레르라는 작은 열차를 타거나 사크 레 쾌르 성당 아래에서 출발하는 전동 관광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몽마르트르라는 말은‘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로마 점령 시기인 서기 250년경 생 드니 성자가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를 한 후, 잘려진 자신의 머리를 들고 지금 파리 북부의 생 드니 성당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는 전설에서 언덕의 이름이 유래했다. 생 드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개회식과 폐회식이 열린 파리 근교의 도시다. 해발 180m 정도 되는 몽마르트르 언덕은 파리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옛날 로마 점령 시대부터 신전이 많이 들어섰던 곳이다.
그 이후 이곳은 포도밭, 야채밭 등이 널려 있는 가난한 동네였고 곳곳에 풍차도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몽마르트르라는 행정 구역으로 정식 등록이 되는데 당시 거주자가 고작 638명 정도에 불과했다. 몽마르트르 언덕이 파리 시로 편입된 것은 오스만이 파리 지사일 당시인 1860년이다. 오스만은 부임하자마자 바로 파리 시 전체를 공사장으로 만들며 도시 계획을 시작했고, 도시 중심부에서 밀려난 노동자와 빈민들이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는 집값이 싼 달동네였고 특히 몽마르트르에서 만드는 포도주는 신고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빈민들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몽마르트르의 유일한 산업이 있었다면 석고 채취였는데, 인근 광장 이름에 하얀색을 뜻하는 블랑쉬 광장이 있어 몽마르트르 언덕이 석고 채취장이었음을 일러준다.
몽마르트르는 파리 코뮌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곳이다.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는 스당 전투에서 적군의 포로가 되고 전쟁은 패색이 짙었다. 공화정이 선포되었지만 새로운 정부는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고 보르도에서 소집된 국민 의회는 보수파 일색이었다. 게다가 이 의회는 국민 방위군의 월급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무모한 결정을 내려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많은 이들이 이 월급으로 먹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871년 1월 28일, 마침내 프랑스 정부가 프러시아에게 항복을 하자 파리 시민들은 궐기하기 시작했다. 보르도로 내려가 있던 의회는 파리 시민들을 폭도로 간주했다.
처음에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던 국민 방위군 대포를 반납하라는 명령에 반대해 일어났던 작은 규모의 소동은, 대포를 반납받으러 왔던 정부군이 장교들을 감금하고 시민군에 합류해버리자 걷잡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왕당파와 부르주아들은 베르사유로 가 정부군을 지휘했고 파리 시청에서는 파리 코뮌이 선포되었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그의 글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 코뮌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의 영광스러운 용광로’ 라고 불렀다. 하지만 5월 21일에서 28일까지 계속된 베르사유 군과 코뮌 군과의 전투는, 이른바 ‘피의 일주일’ 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남긴 채 베르사유 군의 승리로 끝났다. 투항한 시민들을 포함해 수만 명의 시민들이 죽었고 튈 르리 궁과 파리 시청 등 많은 건물들이 화재로 불타버린다.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1914년까지 몽마르트르는 가난한 예술가 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된다. 르누아르는 이곳에 거주하며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등 많은 그림을 그렸고 위트릴로 역시 많은 풍경화를 남겼다. 20세기가 시작되자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 이제 막 파리에 도착한 젊은 화가들이 ‘세탁선’이라는 별명이 붙은 허름한 집에 모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07년 피카소의 그 유명한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이 완성된 곳도 이곳이었다. 이들 젊은 화가들 이전에 이미 반 고흐, 고갱 등이 19세기 말 몽마르트르를 드나들었다.
1889년에 문을 연 유명한 카바레 ‘물랭 루즈’는 툴루즈 로트렉 등의 화가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고, 무희들은 인근의 창녀들과 함께 화가들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
다. 이미 몽마르트르는 축제와 술의 동네가 되어갔고 집값도 옛날처럼 싸지가 않았다. 엄청난 주량 때문에 술고래라는 뜻의 ‘라 굴뤼’ 라는 별명으로 불린 여인을 비롯해, 많은 술집 여인들의 노래와 춤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인,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르를 떠나 파리 중심가에 있는 몽파르나스로 이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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