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디 JEUDI
누구나 왕족이 되는 그 곳, 궁
프랑스 파리 | 2022.03.10
파리 주요 정보
유럽이 탐낸 완벽한 예술품, 베르사유 궁
살아있는 왕을 만나는 곳, 버킹엄 궁
각국의 근위대
전 유럽이 탐낸 완벽한 예술품, 베르사유 궁
“620평 부지에 지은 궁전에 52억원이 들어갔고, 황실 의상과 소품에만 4억원을 썼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궁’ 이야기다. 일부 부유층 사이에선 이 드라마를 보고 집안 인테리어를 왕궁처럼 바꾸는 신드롬이 일기도 했다. 우리 모두 마음 속으론 왕족이 되기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 TV 세트가 아닌 진짜 궁으로 떠나보자. 모든 궁의 모델, 베르사유로 안내한다.

해돋이를 바라보는 아폴론의 침실
베르사유궁은 두 가지 코스로 관람할 수 있다.
하나는 국왕의 공간(집무실, 침실, 근위대실, 접견실, 서재, 사냥개의 방 등)을 중심으로, 다른 하나는 궁의 주요 내부를 볼 수 있는 왕의 대전, 거울의 방, 왕비의 내전을 중심으로 구경한다. 되도록
두 코스 다 관람하도록 권한다. 루이 14세의 침실에 들어가서 정면을 쳐다보면 정확히 동쪽으로
서 있게 된다. 루이 14세가 스스로를 제우스의 아들인 태양신 아폴론과 동일시하고 침전을 해가
뜨는 정동향에 위치시켰기 때문이다.
베르사유궁의 실내 인테리어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총동원되어 제작했다. 실내의 천장은
예외 없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화려한
천장화로 장식되어 있다. 벽, 바닥은 물론이고
촛대와 문고리 하나까지 비례와 간결함을 미덕으로 삼았던 고전주의 양식에 따라 제작되어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난방 목적으로 벽에 걸거나
바닥에 깔았던 양탄자도 빼놓을 수 없다. 유명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면 이 본에 따라 파리 인근의 공방에서 비단으로 제작했다. 현재 왕비의 침실에 있는 양탄자, 커튼과 침대보는 프랑스 리용
산 비단을 이용해 옛날 그대로 복원한 작품이다.
궁전 관람을 마치면 정원 산책의 순서다. 베르사유 정원은 그 광대한 규모와 엄격한 기하학적 비례, 그리고 테라스, 분수, 조각 등의 장식까지 가장 완성도 높은 정원을 이뤄냈다. 유럽의 다른
궁은 모두 이 정원을 베껴 조성했다. 루이 14세는 이 정원 설계에 직접 참여했고, “베르사유 정원을 산책하는 방법” 이라는 팸플릿도 직접 썼다. 그러나 굳이 이 책이 없어도 정원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우선 궁전 앞부터 느긋하게 걸으며 숲과 곳곳의
조각상, 분수를 구경할 것. 그리고, 십자 모양의
대운하에서 배를 빌려 노를 젓거나, 자전거를 빌려 타고(여권을 맡겨야 함) 숲 속 오솔길을 달려
보자. 휴일 교외에 피크닉 나온 파리지앵이 된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정원에 싫증을 내고 한 구석에 시골풍의 정원을 따로 만들었다. 이 정원도 의외로 예쁘다.
베르사유 정원은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4시간은 잡아야 여유있는 산책을 할 수 있다.

베르사유 정원

왕비의 침전
베르사유 정원에서 춤추는 분수들
4~9월에는 토, 일요일 및 공휴일에 하루 두 번
분수 축제가 열린다(오전 11시~12시, 오후 3시
30분~5시). 정원 곳곳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바로크 음악의 선율에 맞추어 수많은 분수의 물줄기가 군무(群舞)를 추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제왕의 축제에 초대받은 귀족인 듯한 환각에 빠진다. 이 시기에 베르사유를 찾으면 궁전
외에 정원 입장료를 따로 내야 하지만, 결코 돈이 아깝지 않다. 몇 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정원을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개방했다. 옷만 깨끗이 입으면 누구나 이 정원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기회를 틈탄 소매치기가 정원에 들어와 귀족의 시계를 슬쩍하는 사건도 종종 일어났다. 귀족이
아닌 평범한 관광객도 베르사유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있다가 후회하지 말고 소지품을 주의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베르사유를 모방한 궁전인 상수시 궁

쇤부른 궁
베르사유를 모방한 궁전들
루이 14세가 50년 가까운 시간을 쏟아부어
베르사유궁을 짓자, 이웃 국가의 왕들은 베르사유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건축가와 미술가, 정원사까지 프랑스에서 초청됐다. 그렇게 지은 궁이 합스부르그왕조의 궁전인
비엔나의 쇤부른궁과 베를린 근처 포츠담의 상수시궁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묘사한 벽화, 거장들의 회화가 걸린 실내 장식,
좌우 대칭으로 설계된 정원 모두가 베르사유 그대로다. 촛대와 의자까지 똑같다. 베르사유의 파워는 중국까지 건너갔다. 청나라 건륭제는 베르사유를 보고 돌아온 사신들의 보고를 듣고, 외국인 선교사를 시켜
베이징 서쪽 교외의 황실 정원인 원명원(圓明園)에 베르사유를 본뜬 서양루(西洋)라는 궁을 지었다. 원명원과 서양루는 청나라
말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약탈한뒤 불태워버려, 지금은 폐허만 남아있다.

파리에서 베르사유 가는 방법
파리 시내에서 RER C 선을 타고 베르사유 리브 고슈(Versaille-Rive Gauche) 역까지 약 45분 소요된다. 기차를 이용할 경우 몽파르나스 역에서 베르사유 샹티에(Versaille Chantiers) 역까지 약 40분 소요되며 역에서 궁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다.
살아있는 왕을 만나는 곳, 버킹엄 궁
영국 여왕의 정전이 바로 버킹엄 궁이다. 이곳은 또한 영국을 찾은 국빈을 영접해 화려한 만찬 등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기타 중요한 국경일에 여왕과 왕실 가족이 발코니에 나와 영국 국민들과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버킹엄 궁의 전경. 궁 앞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상이 서 있다.

영국 왕실의 문장
버킹엄 궁
Buckingham Palace
영국 국왕의 정전인 버킹엄 궁의 역사는 1702년
버킹엄 공작 존 셰필드가 뽕나무 밭을 구입해
버킹엄 하우스를 지으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벽돌로 지은 저택에 불과했다. 1762년 조지 3세가 18살인 자신의 젊은 부인 샤를로트를 위해 이 저택을 구입한 이후 왕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어 왕위에 오른 조지 4세는 건축가
존 내시John Nash의 충고에 따라, 벽돌집이었던 버킹엄 하우스를 바스Bath 산 석재로 장식해 외관을 바꾸고 정문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버킹엄하우스는 네오클래식 양식의 궁으로 다시 태어난다. 궁의 서쪽 부분이 마련되는 것도 이때다.
하지만 버킹엄 궁은 많은 왕궁 중 하나였을 뿐이며 193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이후에나 국왕들이 상주하는 궁전이 된다.
1837년 18세의 젊은 여왕, 빅토리아가 등극하자
바로 이 궁에 거처를 정했다. 이때부터 내시가
설계한 대리석 궁륭인 마블 아치Marble Arch
위에 궁정 깃발이 펄럭이게 된다. 이후 공사가
계속되어 현재와 같은 궁의 모습이 갖추어진다.
동쪽 건물이 완공되면서 남, 북 건물과 이어져 사각형의 안마당이 형성되고, 1913년 더 몰The
Mall 가와 직선으로 연결된 건물과 발코니가 들어선다. 이 발코니가 국경일이 되면 왕과 왕실
가족들이 나와 국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곳이다. 2만 m2
의 호수를 포함해 약 17만 m2
에
이르는 대정원, 그리고 무도회장, 음악당, 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 접견실(녹색의 방)과 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다. 현재 매일 거행되는 근위병
교대식은 버킹엄 궁전의 명물이자 중요한 관광
이벤트이기도 하다. 약 300명의 인원이 버킹엄
궁의 업무를 맡아 처리하고 있다. 여왕이 궁에
있을 때에는 궁 정면에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문양이 들어가 있는 왕실기가 게양된다.
궁은 8, 9월에 입장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돈으로 2만 원이 넘는 비싼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이 비싼 입장료는 윈저 성을 복원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기금으로 사용된다.
버킹엄 궁은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부군인 에드워드 공의 런던 궁정이며 앤 공주와 요크 공도
궁전 안에 사저를 갖고 있다. 이들을 보필하는
시종 50명은 같은 궁에 머물며, 기타 다른 시종
들은 왕실 마구간인 로열 뮤스에 기거한다.
궁 앞의 원형 광장에는 빅토리아 여왕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너머로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와 트라팔가 광장으로 이어지는 더 몰 산책로가 우거진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따라 자리 잡고 있다.
광장 한쪽에는 1833년 왕실 근위대 막사로 건립된 웰링턴 막사가 있다. 현재는 근위대 박물관과
근위대 예배당이 들어서 있다. 현재의 건물들은 2차 대전 당시 파괴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 위치 트라팔가 광장과 이어진 더 몰 가 끝에 위치
- ☎ (020)7839-1377, (020)7321-2233
- 교통편 지하철 St. James's Park, Green Park, 또 는 Victoria 역
- 개관시간 궁전-7월26일~9월24일 매일 9:45~18:00 (15:45분까지 입장)
- 근위병 교대식-4월~7월 매일 11:30, 이 외의 달은 격일제 운영 11:00
- 웹사이트 www.royal.gov.uk

[버킹엄 궁 정문 앞.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 ]
로열 뮤스(왕실 마구간)
원래는 현재의 국립 미술관 자리에 있던 것을 건축가 내시가 19세기 초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왕실 마차와 자동차들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대관식 마차인 1762년에 제작된 무게 4톤의 골드 스테이트코치Gold State Coach와 1961년 형 롤스 팬텀 왕실 승용차가 볼 만하다.
2002년 여왕의 금혼식을 기념해, 보수 공사 후
다시 문을 연 로열 뮤스의 여왕의 갤러리 Queen’s Gallery에는 홀바인의 수채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소묘 작품 등 왕실 소장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 위치 Buckingham Palace, Buckingham Palace Rd., SW1
- ☎ (020)7839-1377
- 교통편 지하철 Green Park 혹은 Victoria 역
- 개관시간 3월 25일~7월24일, 9월 25일~10월 29일(토요일 제외) - 11:00~16:00(15:15까지 입장) 7월 25일~9월 24일 - 매일 10:00~17:00 (16:15까지 입장)
- 휴관일 7월 3,10,17일, 공식방문 기간
- 웹사이트 www.royal.gov.uk

[ 근위대 교대식.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
근위대 교대식
근위대 교대식은 5월에서 8월까지는 매일 1회, 나머지 철에는 2일에 한 번씩 오전 11시 30분에 열린다. 근위대는 그레너디어Grenadier, 콜드스트림Coldstream, 스코트Scots, 아이리쉬 Irish, 웰시Welsh 등 5개 부대로 구성되어 있다. 근위대는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의 짙은 남색 깃을 단 붉은색 상의에 검은 곰털로 만든 둥근 통 모양의 모자를 착용한다. 계급이나 각 부대는 모자의 왼쪽이나 오른쪽에 꽂는 털 색깔과 상의의 단추 배열 등으로 구분한다. 1656년에 창설된 콜드스트림은 오른쪽에 붉은색 털 장식을 꽂고 단추가 2개씩 모여 있는 상의를 착용한다. 여왕의 생일에 거행되는 가장 화려한 사열식을 특히 트루핑 더 컬러Trooping the Color라고 한다.
각국의 근위대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거리의 경찰관도 구경거리일 수 있고, 길거리에서 입을 맞추는 젊은 연인들도 볼거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낯선 이국의 풍물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근위대이다.


영국의 대표적 관광거리 중 하나인 영국 근위대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꼭 성당이나 개선문 같은 웅장한 기념물이나 박물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볼거리를 만나볼 수 있다. 거리의 경찰관도 구경거리일 수 있고, 길거리에서 입을 맞추는 젊은 연인들도 볼거리가 될 수 있다. 반면교사 (反面敎師)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것만 보는 것이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심지어는 지하철역의 노숙자도 볼거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길거리에 서 만나는 낯선 이국의 풍물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근위대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 근위대를 상품성 있는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영국 버킹엄 궁의 왕실 근위대일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만 근위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더 오래된 바티칸 시국의 교황청 근위대도 있고, 바로크 건축의 도시 프라하의 프라하 성에도 근위대는 있으며, 그리스와 러시아 크렘린 궁의 무명 용사비에도 근위대가 있다. 모두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으며, 걸음걸이나 교대식 또한 국가마다 달라 우연히 찍게 된 사진을 모아놓고 보면 흥미롭다. 최근에는 한국 경복궁의 광화문 앞이나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도 한국식 수문장이 모습을 보여 많은 외국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한 가지 유감이라면, 한국의 근위대 중 일부 병사들이 너무 피곤해 보인다는 점이다. 너무 오랫동안 서 있어서인지, 아니면 복장이 몸에 어울리지 않아서인지, 전혀 근위대 같은 모습이 아니어서 안타깝다. 이 점은 조금 고쳐야 할 것이다.
영국 근위대
영국 국왕의 정전인 버킹엄 궁 앞에서 진행되는 근위대 교대식은 5월에서 8월까지는 매일 1회, 나머지 철에는 2일에 한 번씩 오전 11시 30분에 열린다. 이 멋진 광경을 보려면 서둘러서 자리를 잡아야만 한다. 근위대는 그레너디어Grenadier, 콜드스트림Coldstream, 스코트Scots, 이리시 Irish, 월시Welsh 등 5개 부대로 구성되어 있다. 근위대는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의 짙은 남색 깃을 단 붉은색 상의에 검은 곰털로 만든 둥근 통 모양의 모자를 착용한다. 계급이나 각 부대는 모자의 왼쪽이나 오른쪽에 꽂는 털 색깔과 상의의 단추 배열 등으로 구분한다. 1656년에 창설된 콜드스트림은 오른쪽에 붉은색 털 장식을 꽂고 단추가 2개씩 모여 있는 상의를 착용한다. 여왕의 생일에 거행되는 가장 화려한 사열식을 특히 트루핑 더 컬러Trooping the Color라고 한다
영국 근위대에는 이외에도 흔히 호스 가즈 Horse Guards로 불리는 기마대가 별도로 있다. 호스 가즈 근위대 앞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유혹을 해도 늘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말을 탄 두 명의 기마 초병이 지키고 있다. 이 초병들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까지 한 시간마다 교대한다. 기병이 아닌 일반 초병이 보초를 서는 문 반대편의 연병장Horse Guards Parade에서도 여름이면 매일 오전 11시에 근위대 교대식이 거행된다. 호스 가즈는 국빈 방문 때 영접 행사가 거행되는 곳이다. 여왕이 런던에 있을 때에는 대 근위대Long Guard가, 여왕이 런던에 없을 때에는 소 근위대가 영접과 근위 임무를 맡는다. 호스 가즈 퍼레이드 맞은편에는 1차대전 때 전사 한 근위대를 기리는 가즈 메모리얼 비가 세워져 있다.

[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발되는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 ]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
바티칸 스위스 근위대는 1506년 1월 21일,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에 의해 창설되었다. 총명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인 기질이다 분했던 교황은 스위스 남자들 중 독일어를 사용 하는 건장한 사람들만 골라 뽑았다. 이들 스위스 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탈리아나 스페인 병사들에 비해 우선 키가 크고 체격이 장대 하다는 데에 있었다. 물론 그만큼 비싼 돈을 주어야 했고 또 고기도 충분히 먹여주어야만 했다. 유럽의 군주들은 모두 스위스 근위대를 고용하고 싶어했지만 그 경비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근위대 선발은 엄격한 기준에 의해 행해진다. 우선 신장이 1m 75cm를 넘어야 한다. 나이는 30세 이하여야 하고 무엇보다 스위스에서 군복무를 한 경력이 있어야만 한다. 최근에는 인도 출생의 한 사나이가 스위스 근위대에 입대했는데, 근위대 사상 최초의 유색인종이라고 한다. 물론 이 인도 출신의 청년은 스위스에 입양되어 스위스에서 군 복무를 마친 스위스 국적의 청년이다.
옛날에는 많은 수의 사병들을 거느렸지만 오늘 날은 정확하게 1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끼가 달린 긴 창을 사용하는 일반 사병이 70명, 하사관이 23명, 사관이 4명 그리고 2명의 고수와 근위대장인 한 명의 대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드는 도끼 창은 길이가 2m에 무게가 6kg 이나 나간다.
근위대의 주 임무는 말할 것도 없이 교황 경호다. 근위대 기에는 <강하게, 충성스럽게>라는 근위대의 모토가 적혀 있다. 창설기념일은 1월 21일이지만, 스위스 근위대는 이날 대신 매년 5월 6일을 기념일로 지낸다. 1527년 5월 6일,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로마를 침공해 대약탈을 자행했을 때, 147명의 스위스 근위대원들이 목숨을 던져 교황을 사수한 끝에 클레멘스 7세는 무사히 산탄젤로 성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스위스 근위대 막사 앞에는 이날의 무훈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5월 6일은 또한 매년 충성 서약을 새롭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충성 서약을 할 때면 모든 근위대원들이 왼손으로는 근위대 기를 붙잡고 오른손을 들어 성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기호인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인다. 근위대들이 입는 화려한 옷을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지지만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대단히 화려한 옷임에는 틀림없다.
군기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스위스 근위대이지만, 1998년 믿기지 않는 치정 사건이 일어나 그 동안의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근위대장으로 막 임명된 44살의 한 사나이와 그의 부인이 한 하사관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 범인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 이 스캔들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산타그마 광장에서 열리는 그리스의 근위대 교대식 ]
그리스의 근위대
아크로폴리스 북쪽에 인접해 있는 플라카 구역은 모나스트리키아 구역과 함께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된 구시가지로 중세와 오스만투르크 제국 점령 시대의 아테네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인근의 아크로폴리스로 인해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아테네 최대 번화가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보다는 외국인들이 더 많은 곳이다. 많은 옛 거주지들을 복원해 놓았고 가로수도 잘 정비되어 있으며 또 그리스 식 카페인 타베르나도 많아 식사와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매력적인 좁은 길들이 그물처럼 얽혀있는 플라카 인근에 오면 약간 쾌쾌한 식용기름 냄새를 맡게 된다
플라카 구역에는 아테네 명물 볼거리 중 하나인 무명 용사비를 지키는 근위대의 교대식이 열리는 신타그마 광장(헌법 광장)이 있다. 이 그리스 아테네 근위대는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근위대인지도 모른다. 짧은 치마를 입고 검은 방울 장식이 달린 붉은 구두를 신은 채 어깨에는 숄을 걸친 근위대의 행진 모습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질서정연하지만 걸치고 있는 민속의상이 너무나 특이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 의상은 군복이 아니라 민속의상으로 민속 춤을 출 때도 착용하곤 한다. 평소에는 오전 11시에 두 명씩 짝을 이루어 간단한 교대식을 갖지만, 일요일 11시에는 가장 화려한 대규모 교대식이 열린다. 신타그마 광장 인근에는 불리Vouli로 불리는 그리스 의회도 자리 잡고 있다.


프라하 성 앞을 지키는 체코의 근위대
체코의 근위대
프라하 성 입구를 지키는 근위대도 특유의 부동 자세로 눈길을 끄는 근위대이다. 근위대가 지키고 있는 정문의 두 기둥 위에는 조각가 플라처가 1771년에 제작한 거인 전사상이 올라가 있다. 전사상은 성을 보호하기 위해 몽둥이와 칼을 들고 적을 때려눕히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매 시간 교대를 하는데 가장 화려한 교대식은 정오에 열린다. 금박의 철문 가운데 있는 문장은 18 세기에 제작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문장이다.
프라하 성의 역사는 그대로 프라하의 역사이기도 하다. 서기 930년에 보리보이 1세의 손자인 바츨 라프 1세가 성인 비투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여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성 비투스 성당을 세웠다. 오늘날과 같은 위용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중엽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로마 황제이기도 했던 카를 4세(1316~1378) 치하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카를 4세는 치하 동안, 프라하 성 뿐만 아니라 성 비투스 성당도 크게 증축하면서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성당을 보헤미아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특히 당시는 고딕 양식이 가장 번성하던 시기로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성당은 고딕 양식을 따르게 되는데, 14세기 중엽인 1344년 프랑스 고딕 건축가인 마티유 다라스에 의해 성 비투스 성당이 고딕 성당으로 다시 지어져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다.
1918년에는 체코 1대 대통령인 마사리크 (1850~1937)가 대통령궁이 된 프라하 성에 입성한다. 냉전 시기 동안 프라하 성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억누르고 있던 비인간적인 공산주의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프라하 최대의 역사유적지이자 관광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현재는 체코 공화국의 공식 대통령궁이기도 하다.

크렘린 궁을 지키는 러사아의 근위대
러시아의 근위대
러시아 어로는 끄레물이라고 하는 크렘린 궁 안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숨을 거둔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묘가 있고 이 묘에는 24시간 타오르는 추도의 불꽃과 보초를 서는 근위대가 있다. 옛날 구 소련 시절에는 신혼부부들이 이곳을 들러 헌화를 하곤 했던 곳이기도 하다. 추운 나라인 러시아답게 언제나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있 는 근위대는 크렘린 궁만큼이나 무겁고 음산해 보인다.
크렘린의 붉은 성벽 안에는 크렘린 대궁전, 무기고, 러시아 대통령궁, 황제의 대포, 이반 대제의 종루, 황제의 대종 그리고 성모승천 성당을 비롯한 여러 개의 성당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인근에 는 너무나도 유명한 붉은 광장을 비롯한 바실리 성당 등의 관광 명소들이 있다. 시간이 부족한 이들은 크렘린 궁 인근만 방문해도 대표적인 명소들을 볼 수 있다.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모스크바는 18세 기 초, 러시아의 수도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겨지는 바람에 잠시 그 위상이 흔들리며 발전이 주춤하는 듯했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다시 수도가 되어 이제는 인구 900만을 헤아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가 되었다. 크렘린의 전체 면적은 약 8만 5천 평 정도 된다. 러시아 정치의 심장부인 크렘린은 동시에 권력 투쟁의 무대였으며 음모와 숙청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곳으로 윈스턴 처칠이 지적했던 대로 ‘철의 장막iron curtain’ 뒤에 자리 잡고 미국과 함께 냉전을 벌였던 20세기 역사의 무대이기도 했다. 1990년 크렘린 궁과 붉은 광장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 조선시대의 근위대를 재현한 경복궁의 근위대 ]
[ 한국의 근위대 ]
한국의 근위대
경복궁 남쪽 정문인 광화문에는 현재 조선시대 근위대를 재현한 옛 복장을 한 근위대를 볼 수 있다. 단청의 색을 닮은 원색의 복장과 각종 깃발은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광화문은 14세기 말인 1399년에 지은 문으로 1425년(세종 7)에 광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된 것을 한참 후인 1865년(고종 2)에 재건했다. 1927년 일제 총독부가 동쪽으로 이전시켰고 이마저 6.25 때 무너져 버린 것을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8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다시 지은 것이며, 현액(懸額)도 당시 박대통령이 한글로 직접 썼다.
광화문은 오랫동안 옛 조선총독부 건물과 중첩되어 있다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 옛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면서 경복궁 복원공사로 옛 위용을 되찾았다. 위치나 철근 콘크리트 골조 등을 바로 잡아야겠지만, 어쨌든 태평로에서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축상에 위치해 있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이 광화문에 조선시대 근위대 복장을 한 근위대가 근무를 서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늦은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광화문 앞에 서 있는 근위대가 그리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근위대가 어설픈 느낌을 주는 것은 대한민국이 영국이나 일본 혹은 태국처럼 왕국이 아닌 공화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한 장식적 기능으로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근위대가 위엄있고 멋있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왕정을 부활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 한 가지 유감인 것은 병사들의 자세와 복장이다. 이왕 조선시대 근위대를 부활시켜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려면, 위병 근무를 서는 병사들의 자세와 복장을 조금 더 다듬어야 할 듯하다. 옷깃이 매력 포인트인 한복의 멋을 살리는 방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 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