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고성 투어

프랑스

[ 호수 위에 떠 있는 아제 르 리도 성 ]


ⓒ Design Les Vacances 2007

 

프랑스 중부를 관통해 대서양으로 흘러내려 가는 루아르 강 인근의 약 200km 주위에는 30여 개의 크고 작은 중세와 르네상스 성들이 모여 있다. 앙제, 소뮈르, 투르, 앙부아즈, 블루아, 오를레앙 등 6개 도시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이 성들은 군사적 목적으로 지어진 요새에서부터 르네상스의 궁정 역할을 했던 궁에 이르기까지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성 하나 하나에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어 사료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성들이다. 이를 고려해 이 일대는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루아르 강 인근에 이렇게 많은 성들이 들어서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남하한 게르만 민족 중 한 부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이 무너진 9세기 이후 중세 봉건 사회의 지방 호족들은 파리가 아닌 이곳에 성을 짓고 살고 있었다. 파리의 왕들도 노르만 족의 침입을 피해 이곳으로 내려왔다. 프랑스의 중앙부라는 이 지역의 지리적 여건과 루아르 강을 통해 대서양으로의 진출이 용이하다는 점도 많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았다. 특히 15세기 말에 시작된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왕과 귀족들은 이탈리아의 앞선 건축과 문화 예술을 앞다투어 받아들여 16세기에는 이곳에 경쟁적으로 성을 짓기 시작했고 이탈리아의 영향으로 아름다운 정원도 함께 건설된다. 약 2세기 동안 파리와 함께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를 양분하며 황금기를 누렸던 루아르 강변이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은 부르봉 왕조가 탄생한 17세기 초로, 이후 파리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다시 부각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원정 이전까지 루아르 강변에 지어졌던 성들은 대부분 군사적 목적으로 지어진 요새들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13세기 초에 지어진 앙제 성이다. 이후 성들은 15세기 후반 들어 개축되거나 신축되면서 이탈리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요새가 아닌 궁전 개념으로 지어지게 된다. 이탈리아의 영향도 있었지만,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되기도 했고 특히 화약을 이용한 대포가 중요한 병기로 사용되면서 전쟁과 작전 개념에 중대한 변화가 생겨 성의 용도가 바뀌면서 양식적으로도 큰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망루가 사라졌고 또 활을 쏘거나 끓인 기름을 붓던 총안 등이 없어지거나 장식적 요소로 남게 되었으며 정원과 분수 등이 생겨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성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도 사라지거나 아니면 확장되어 인공 호수로 변한다. 이때부터 군주들과 귀족들의 머릿속에는 군사적으로 강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강한 국가이기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다. 이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를 건설하며 꾀했던 문화 정책이 15, 16세기에 루아르 강변을 중심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화려한 축제가 대유행을 하며 격식과 예절이 점차 다듬어지게 되고 문학, 미술, 음악이 장려된다. 궁정에서 써야 할 말이 별도로 존재하기 시작했고 사적인 감정을 숨기는 자제력이 요구되었다. 이런 이유로 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고도의 수사학이 발달하게 된다. 

프랑스 왕으로서 처음 이곳에 성을 짓고 내려온 사람은 샤를르 7세이다. 그는 1418년 잔 다르크의 힘을 빌려 대관식을 갖고 즉위한다. 이후 이곳은 200년 가까이 프랑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 원정을 끝낸 샤를르 8세가 돌아오는 날 루아르 강 위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배들이 전쟁에서 노획한 물건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장식 융단 130여 벌, 39폭의 가죽 벽포, 벨벳을 포함한 각종 피륙, 엄청난 양의 고서들과 보석, 조각, 회화 작품들……. 이뿐만이 아니다. 오르간을 비롯한 악기, 가구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왕들은 이탈리아 예 술가들을 함께 데리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중에는 재단사, 요리사는 물론이고 앵무새 조련사도 끼어 있을 정도였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루이 12세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며 프란체스코 라우라나와 니콜로 스피넬리 등을 데리고 와 루브르를 버리고 루아르 강변에 플레시 레투르 성을 짓고 머물게 된다. 이전의 요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돌림 장식이 나타나고 벽난로 등에도 화려한 장식 조각이 올라가게 된다. 정원은 요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요소다. 분수, 전지 작업을 해 마치 벽돌로 쌓은 것 같은 조형미를 뽐내는 화단과 꽃밭 등이 거의 모든 성에 필수 요소로 첨가된다.

샤를르 8세를 따라 프랑스에 들어온 나폴리 출신의 프라 파첼로 디 마르코글리아노 등 이탈리아 정원사들은 기하학적 구성을 보이는 프랑스 식 정원의 초석을 마련한다. 이러한 왕족들의 변화는 주위의 부유한 귀족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쳐 왕족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등 여러 방면에서 협력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 스스로도 왕족들을 모방해 화려한 성을 짓기 시작하고 때론 궁정의 일원으로 들어와 함께 생활하기도 한다. 자크 쾌르 같은 상인은 부르주 성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묘사된 것처럼, 동양의 향신료, 비단, 면 등 이국적 산물들을 배로 날라와 왕족들에게 공급하기 시작했다. 서너 곱절로 이익을 남긴 것은 물론이다.

16세기 유명한 시인 롱사르가 자신의 시에서 예찬했던 미인 카상드라도 사실은 이탈리아 금융업자인 베르나르도 살비아티의 딸로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에 건너온 이탈리아 여인이었다. 이러한 화려함과 호사스러움은 재정 적자로 궁정을 위협했지만, 왕들은 이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상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샹보르 성의 위용과 그 성에 살았던 프랑수아 1세의 성대했던 행차는 이를 잘 일러준다. 샹보르에 초청된 베네치아 대사도 성의 화려함에 놀라 두 눈을 의심하고 돌아갔을 정도였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묘가 있는 앙부아즈 성 ]


프랑수아 1세와 함께 당시 유럽을 양분해서 지배하고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프랑스 식으로는 샤를르 켕) 역시 샹보르 성을 본 후 “인간 정신이 가장 위대하게 표현된 작품” 이라는 말을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프랑수아 1세를 따라 루아 르 강가의 클로 뤼세 성에 머물렀고 앙부아즈 성의 운하 조성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앙리 3세 때 들어 처음으로 왕을 부를 때 ‘폐하Sa Majeste'’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고 왕의 행차에는 스위스 근위대를 포함해 1,000명이 넘는 호위대가 뒤따랐다. 당시 모후인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여인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는 미인계의 수족들인 수백 명의 궁녀들을 대동하고 행차를 했다. 왕과 모후 두 사람이 함께 행차를 할 때면 기타 왕족들, 그 수행원과 병사들까지 무려 1만 5,000명이 참여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인구 만 명이 넘는 도시가 25개에 지나지 않았던 점을 염두에 둔다면 얼마만큼 호사스러운 규모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이러한 궁정의 모습은 17세기 여류 소설가 마담 라파이예트가 쓴 소설 <클레브 공작부인>에 잘 묘사되어 있다. 

루아르 강 인근의 성이 항상 즐겁고 화려한 일들만 진행된 곳만은 아니었다. 성에서의 생활이 화려할수록 그것은 은밀하고 추한 것을 가리기 위한 하나의 연막일 경우가 많았다. 종교전쟁 동안 기즈 공의 암살이 일어난 곳도 이곳 루아르 성이었고 왕비이면서도 오랜 세월 후궁처럼 살아야 했던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음모와 질투가 서려있는 곳도 이곳 일대의 성이었다. 이 ‘이탈리아 상인의 딸’은 300명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뽑아 ‘에스카드롱 볼랑’ 즉, ‘미인 부대’를 만들어 이용했을 정도였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뒤늦게 프랑스로 들어 온 르네상스는 사상과 과학에 기초한 진정한 문예부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폐결핵과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던 세 아들을 옥좌에 앉혀놓고 섭정을 폈던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통치 시기에 르네상스는 본질이 아니라 그 외관만 프랑스에 들어온 셈이었다. 

종교전쟁, 영화 <여왕 마고>에서 잘 묘사된 바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 그리고 1583년, 1584년, 1586년 세 번 연속 발병해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 등으로 인해 투르 인근의 인구는 격감했고 게다가 흉년까지 겹쳐 마침내 루아르 강 인근의 시대가 저물고 만다. 동시에 발루아 왕조가 막을 내리고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면서 무대 역시 파리와 파리 인근의 퐁텐느블로, 그리고 다시 베르사유로 옮겨가게 된다. 루아르 강변의 옛 성들을 돌아보는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새로운 인문주의가 꽃피고 자연 국경을 중심으로 한 민족 국가가 고유의 문화를 강조하던 서구 근대사의 출발점으로 가는 여행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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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01 - 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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