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파리
Musée du Louvre
<역사>
12세기 말 중세 시대의 필립 오귀스트 왕에서 20세기 말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까지 8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루브르.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이 장구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루브르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는 센느 강변은 12세기 말, 바이킹 족들의 침입이 잦아 군사적 목적으로 세운 중세식 성이 있던 자리다. 14세기 들어 샤를르 5세 때, 루브르는 처음으로 왕궁으로 사용된다. 이때부터 왕의 진귀한 귀중품과 도서들이 루브르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화려한 거실과 집무실들이 마련된다. 하지만 샤를르 5세가 서거하자 프랑스 궁정과 귀족들은 루브르 궁을 버리고 파리 남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루아르 강 쪽으로 내려갔고, 이로 인해 루브르 궁은 다시 원래대로 군사적 목적으로 쓰이게 된다. 그 후 이 중세 성은 다시 파리로 돌아온 프랑수아 1세에 의해 1545년 헐리기 시작해 지금과 같은 모습의 르네상스 식 성이 건립된다. 이후 프랑스 절대왕정이 막을 내리는 루이 16세 때까지, 역대 모든 프랑스 왕들은 어떤 식으로든 궁에 자신들의 치세 흔적을 남기게 된다. 나폴레옹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랑스가 대혁명의 와중이었던 1793년 루브르 궁은 무제움Museum 즉, 박물관으로 선포되면서 왕족, 귀족, 성직자들이 소장하고 있던 예술품들이 압수되어 유물로 들어오게 된다. 나폴레옹 제정 때는 잠시 나폴레옹 박물관으로 선포되면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강탈해 온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루브르에 들어온다. 상당수의 유물들을 돌려주었지만, 루브르에 그냥 남은 것들도 있다.
루브르 궁은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 때 들어 지금과 같은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리볼리 가에 면한 건물이 완성되었고 내부도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획기적으로 전시 공간을 늘리게 된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대 루브르 박물관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20세기 말 14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당시 ‘대 루브르Le Grand Louvre’ 계획에 의거해 약 20년 동안 이루어진 공사가 끝난 후다. 재무성에서 사용하던 건물이 박물관으로 편입되었고 출입구, 주차장 등 각종 편의시설이 나폴레옹 광장 지하에 생겨났으며 내부 역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는 등 초현대식으로 바뀌었다. 수장고에 보관되던 유물들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고 베르사유 등 야외에 전시되면서 파손 우려가 있던 대형 기념물 조각들 역시 루브르에 들어온다.
모든 공사는 나폴레옹 광장에 유리 피라미드를 세운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아이오 밍 페이가 맡았다. 1981년 대통령에 올라 14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했던 프랑수아 미테랑의 ‘대 루브르’ 공사를 끝으로 루브르는 마침내 800여 년 동안의 긴 변화를 끝내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마지막 공사를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아이 오밍 페이가 담당했다는 것은, 이집트 유물에서 <밀로의 비너스>와 <모나리자>를 거쳐 미켈란젤로의 <노예상>에 이르는 귀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관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이 단순히 프랑스 한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 전 인류의 재산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루브르 박물관 지하]
[루브르 박물관 1층]
[루브르 박물관 2층]
[루브르 박물관 3층]
박물관 편의시설
■ 몰리엥 카페 Cafe′Mollien : 드농 관 2층, 여름에는 테라스 이용 가능
■ 리슐리외 카페 Cafe′Richelieu : 리슐리외 관 2층, 여름에는 테라스 이용 가능
■ 드농 카페 Cafe′Denon : 드농 관 2층
■ 마를리 카페 Cafe′Marly : 피라미드 입구 광장 리볼리 가 방향(08:00~02:00)
■ 위니베르셀 레스토 Universel Resto : 카루젤 갤러리 내, 어린이들이 좋아할 메뉴가 많다.
■ 뮤지엄 숍 : 월, 수 09:30~21:45, 목~일 09:30~19:00
■■■ 메소포타미아 유물
우리들에게 구약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의 역사서들을 통해서만 알려진 고대 근동과 중동 지방의 문명은 오랫동안 완전히 망각되어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서구인들이 문명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작한 고고학 발굴 작업 결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초로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 작업을 한 사람은 프랑스 인 폴 에밀 보타였다. 1842년 당시, 지금의 이라크 북부 지방에 해당하는 모술에 프랑스 영사로 나가 있던 보타는, 고대 니니베 지역의 유적지를 찾아냈고 마침내 이듬해인 1843년 3월, 아시리아의 사라공 2세의 궁전이었던 코르사바드를 발굴해 낸다. 루브르에 들어와 있는 거대한 조각상들은 이 궁전을 장식하고 있던 것들이다
30년 정도 지난 후 역시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에르네스트 드 사르제크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고대 수메르 유적들을 찾아낸다. 이러한 일련의 발굴 덕택에 1881년 마침내 루브르 박물관에 고대 동방관이 별도 전시실로 설치된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비옥한 이라크 평원은 일찍부터 관개 농법이 시행되어 상당히 발달한 고대 문명이 꽃피었던 지방이다. 가장 중요한 문화사적 사건은 역시 문자의 발명과 그 사용이다. 당시는 왕이 곧 사제였던 시대였다. 기원전 3000년경에 일어난 이 문명은 2000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라가슈 왕국 같은 고대 왕국들을 형성하며 발달했다. 서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온 아모리트 인들은 바빌론과 같은 왕국을 건설하여, 기원전 18세기경 함무라비 대왕 치하에서 인근 일대를 통일하게 된다. 상업적으로 크게 번성한 아시리아 왕국이 건설된 것도 이 무렵이다. 바빌론 왕국은 기원전 16세기경 이란으로부터 온 카씨트 인들에 의해 멸망하고 이들은 다시 엘람 왕국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유랑 민족들이 할거하다 다시 아시리아 인들이 통일을 하게 되고, 이어 바빌론 왕들이 다시 왕국을 건설한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등장하는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대 왕국을 초토화시키고, 유대인들을 노예로 끌고 온 때가 바로 이때며 바벨 탑이 완성된 것도 이때다.
■■■ 고대 이집트
나일 강을 중심으로 선사시대에서 기독교가 유입될 때까지 약 4500년 동안 계속되었던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 이집트 문명. 루브르 박물관에는 이 문명을 조망해 볼
수 있는 유물들이 가장 체계적으로 소장되어 있다.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 관의 기원은 1826년이다. 수수께끼 같기만 하던 상형문자 체계를 샹폴리옹이 해독해, 이집트 역사를 선사에서 역사시대로 편입시킨 쾌거를 이룬 해가 바로 1826년이다. 당시 이집트에 가 있던 영국과 프랑스 외교관들은 고고학 붐이 불고 있던 유럽에 자신들이 수집한 이집트 유물들을 팔려고 했고,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샤를르 10세는 샹폴리옹의 청을 받아들여 이 유물들을 구입해, 마침내 루브르 박물관 사각 광장 2층에 전시실을 마련하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집트 관인 이 전시실은 19세기 중엽 세라페움에서 발굴 작업을 한 마리에트의 작업 결과 유물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키게 되고, 특히 이집트 마니아였던 클로 박사의 소장품을 정부에서 구입해 더욱 체계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19세기 말에 들어서자 카이로에 본부를 둔 프랑스 동방 고고학 학회와 루브르 박물관 고고학실의 발굴 작업에 힘입어 유물은 더욱 늘어난다. 일반적으로 이집트 왕조는 다음의 시대 구분을 따르고 있으며 유물도 이 시대 구분에 맞추어 전시되어 있다.
선사시대와 초기 2대 왕조 (기원전 3100~2700)
- 고왕조 (기원전 2700~2200)
- 제1중간기 (기원전 2200~2060)
- 중왕조 (기원전 2060~1786)
- 제2중간기 (기원전 1786~1555)
- 신왕조 (기원전 1555~1080)
- 제3중간기 (기원전 1080~332)
- 그리스 점령기 (기원전 332~33)
- 로마 점령기 (기원전 30~서기 4세기)
■■■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의 유물들은 지금 센느 강변 쪽에 위치한 드농 관 1층에 전시되어 있다. 회화관과 더불어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된 이 유물들은 보는 이들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로 인도하며 서구 예술사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중세 1000년의 암흑기 이전에 화려하게 꽃피웠던 이 고대 문화는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던 서구 사상의 원천이다.
■■■ 프랑스 회화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관 중에서 시대나 유파별로 가장 완벽한 소장품을 구비하고
있는 곳이 프랑스 회화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루이 14세 때부터 이미 중요한
프랑스 회화 작품들이 수집된다. 고전주의를 가능케 한 이 절대군주에 이르러 학술,
문예, 예술 전 분야에 걸쳐 아카데미가 창설되면서 예술가에 대한 메세나Mecenat
(문화 예술, 공익 사업 등에 지원하는 기업들의 활동을 총칭)가 하나의 프랑스적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다. 프랑스 고전주의의 3대 화가들인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샤를르 르 브룅 등의 작품은 거의 루이 14세 때 구입해 왕가의 소장품으로 들어온
작품들이다. 이후 매년 혹은 격년제로 개최된 관전인‘살롱Salon’은 미술품 수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혁명 당시 귀족이나 성직자들이 소유하고 있던 많은
작품들이 몰수되어 국가 재산으로 귀속되면서 루브르의 소장품은 한층 풍부해진다.
필립 샹페뉴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루브르에 들어온다. 하지만 프랑스
초기 회화와 퐁텐느블로 파의 작품까지 소장하면서 지금과 같은 보다 완벽한 컬렉션을 보유하게 되는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 때다. 물론 나폴레옹 1세의 20년 남짓한 유럽 제패 역시 루브르의 컬렉션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했다. 백일천하 이후 완전히 실각하면서 상당수 유물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모든 작품이 반환된 것은 아니었고, 기증되거나 다른 작품과 교환되기도 하면서 루브르 소장품으로 남은 작품들이 적지 않다. 유물 소장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것은 많은 양의 로코코 미술 작품들을 기증한 라 카즈 같은 개인 수집가들이다. 아울러 유물 기증과 구입을 위해 결성된 ‘루브르의 친구들’ 이라는 단체의 활동도 특기할 만하다.
■■■ 스페인 회화
루브르 박물관에 스페인 회화 작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부터다. 문화재 약탈은 전쟁에는 항상 따르기 마련인 일이었고, 이 중 대다수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이후 7월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스페인 미술 열광자였던 루이 필립은 특사를 파견하면서까지 스페인 대가들의 작품을 구입했다. 만일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작품들이
루브르에 없어 마네가 이들 작품을 보지 못했다면 과연 프랑스 미술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스페인 회화는 이후 마네 같은 프랑스 화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 독일 회화
루브르 박물관의 독일 회화관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지만 독일 회화사 전체를 조망해 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각 시대와 사조를 대표하는 핵심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15세기 독일 회화는 독일 박물관을 제외한 전 세계 박물관 중에서 루브르가 가장
뛰어난 그림들을 소장하고 있다. 쾰른 파가 제작한 제단화 연작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루브르의 독일 회화관이 주목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르네상스 거장들의 대표작들이 있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크라나흐는 물론이고 한스 홀바인(아들)의 초상화들은 독일 회화의 보석 같은 작품들이다. 또한 이 대가들 곁에 한스 발둥 그린을 비롯한 기타 독일 르네상스를 빛낸 예술가들이 자리잡고 있어 르네상스 독일 회화를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다.
건축가/작가 : 아이오 밍 페이
휴무일 : 화요일 1월 1일, 5월 1일, 8월 15일, 12월 25일
오픈시간 : 09:00~18:00(수, 금 ~21:45), 매표소는 ~17:15(수, 금 ~21:45), 매표소와 입구가 있는 피라미드는 ~22:00.
교통편 : 지하철 M1, 7 Palais Royal-Muse′e du Louvre 역
전화번호 : +33140205050
주소 : Rue de Rivoli, 75001 Paris, 프랑스
매월 첫째 일요일 무료, 여유롭게 관람하고 싶다면 수, 금 저녁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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