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트 바티칸 MUST VATICAN

바티칸 바티칸

MUST 북

머스트 바티칸 MUST VATICAN

바티칸 바티칸 | 2022.03.09


머스트 바티칸


바티칸에 들어서는 이들은 500년 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창작한 성화나 조각을 떠올리며 별 감흥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맞다.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그리고 <아테네 학당>은 너무나도 자주 보았던 작품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작품들일 수도 있다.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아니 다시 느껴야만 한다. 가톨릭의 본산인 바티칸에, 그리스 철학자들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는 <아테네 학당>이 있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벨베데레의 아폴론>은 간다라 미술을 거쳐 석굴암 본존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스필버그의 는 <천지창조> 에서 나왔다. 다시 보자, 깊이 느끼면서. 

레 바캉스 MUST 바티칸은 중세나 르네상스 전공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베드로가 움켜쥐고 있는 두 개의 열쇠를 보며 왜 열쇠가 두 개일까 궁금해 하는 이들, 혹은 광장의 오벨리스크 앞에 서서 이집트 유물이 왜 바티칸에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줄 아는 이들 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바티칸을 찾았던 괴테와 스탕달 처럼 바티칸에서 감동을 받고 싶은 이들의 손에는 이 책이 들려 있어야 할 것이다.

MUST 언론보도 :

스타일리시한 박물관 가이드 - MBC 뉴스투데이

기업 임원을 타깃으로 한 세계 박물관, 미술관 안내서 - 연합뉴스

명작들이 친절한 설명과 함께 생생하게 펼쳐진다 - KBS 뉴스광장

해외 역수출을 고려하고 있을 정도로 차별화된 내용을 자랑 - 중앙SUNDAY

㈜레 바캉스

레 바캉스는 미래 지식산업의 핵심인 CT(Culture Technology)전문 기업 으로, 아시아, 유럽, 북중미, 중동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의 여행·문화·예술 콘텐츠를 기획,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여행·문화·예술 정보를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출판 사업을 통해 가이드 북 컬렉션, MUST 및 문화 총서 등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iMBC, 신한카드 등 각종 언론매체 및 디바이스(모바일, AVOD)의 요구에 맞는 여행·문화·예술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imagine

V a t i c a n  C i t y ,  t h e  B i g g e s t  M u s e u m  I t s e l f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

면적과 인구로 따진다면,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인 바티칸 그러나 상징적인 의미로본다면, 어디든 교회가 있는 곳이 그 영토이자, 기독교 신자 전부가 국민인 가장 큰 나라, 바티칸

바티칸은 인류의 역사를 기원 전후로 나누어 놓은 인류사 최대의 사건인 예수의 출현과 그로 인해 가능했던 기독교 2,000년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곳이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 예술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 때마다, 또 모퉁이를 돌 때마다 벽화와 조각 그리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베르니니 등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가들의 걸작들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영적으로 예민해진다.

그 옛날 로마를 찾았던 괴테나 스탕달처럼 때론 전율하고, 때론 숨을 몰아 쉬기도 한다. 색에는 영혼의 깊이가 있으며, 선들은 예리하고 비범하다. 모든 예술가들이 바티칸을 찾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intro

Getting to Know the Vatican


미국 문화 예술의 경쟁력, 

19세기까지 모든 예술가들의 성지였던 바티칸.
바티칸 박물관은 물론, 성 베드로 성당과 광장, 시스티나 성당과 정원에 이르기까지
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 예술의 보고이다.


오늘날의 바티칸은 옛날 로마제국 시절, 네로 황제의 정원과 원형 경기장이 있던 로마의 한 언덕이었다.

64년에 순교한 베드로의 무덤도 이곳에 있었다. 324년, 이 무덤 위에 최초로 성당이 세워지면서 “베드로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던 예수의 말이 실현되었다. 그 후 르네상스까지 약 천 년에 이르는 교황권의 전성기 동안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천재들이 동원되어 서구 예술사의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다 나폴레옹 점령과 유럽에 불어 닥친 혁명의 여파로 바티칸은 점차 세속 권력을 상실한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으로 결국 라테라노 협정을 맺으면서 오늘날의 바티칸 시국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이 협정을 통해 성 베드로 성당과 수많은 인류의 문화 예술을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초기 성당은 긴 장방형 건물이었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에 의해 천 년 의 역사를 간직한 이 옛 건물이 헐리고 현재의 성당이 건립되기 시작한다. 이때가 바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카라바조, 베르니니 등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수많은 천재들이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작품들이 성당을 장식했고, 성 베드로 성당은 성소인 동시에 하나의 미술관이 되었다. 미켈란젤로 의 <피에타>,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미술사 최대의 걸작들이 신앙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바티칸 박물관은 역대 로마 교황들이 수집한 방대한 조각, 회화, 공예품, 고문서 등을 소장하고 있다.

교황 클레멘스 14세 치하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공공 박물관으로 출발했다. 이 건물은 교황 피우스 6세 때 확장되었고 현재도 두 교황의 이름을 따 이탈리아식으로 피오 클레멘티노관으로 불린다.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이 약탈해갔던 유물들이 돌아오자, 새롭게 현대식 건물을 지어 이를 보관하게 된다. 동시에 로마 시내 라테라노관에 소장되어 있던 고대 유물과 기독교 유물들을 이전해 현대 기독교 예술 박물관도 문을 연다.


바티칸은 북유럽 르네상스와 프랑스 고전주의는 물론이고, 19세기까지도 모든 화가, 조각가들의 성지였다.

미술의 나라 프랑스의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는 로마에 분교를 설립하고 장학생들을 뽑아 유학을 보낼 정도였다.


순례자인가, 관광객인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함께 세계 3대 순례지 중 하나인 바티칸.

하지만 오늘날의 바티칸에서는 시의 주요 수입원인 관광 명소로서의 역할도 순례지 못지 않게 큰 비중을 차지한다

EDITOR’S LETTER

모든 인간의 영혼에 호소하는 보편적인 울림

바티칸을 찾은 이들은 대부분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고 만다. 손때 묻은 허름한 시골 교회의 순수한 신앙을 느낄 수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성 베드로 성당이 방대한 규모를 갖추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유럽 역사를 훑어보는 흥미진진한 일이며, 동시에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진지한 질문을 던져 보는 기회가 된다.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예수가 베드로에게 했던 말로, 베드로를 묘사한 조각과 그림에는 언제나 열쇠가 등장한다. 성 베드로 성당 역시 그 자체가 거대한 열쇠의 형태를 띠고 있다. 결국 바티칸에 들어선다는 것은 이 거대한 천국의 열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벽화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인류사 최고의 미술품들이지만 동시에 <창세기>에서 시작해 <요한 묵시록>의 최후의 심판으로 끝나는 기독교 세계관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바티칸이 꼭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의미 있는 곳은 아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은 관람자들의 신앙 유무를 떠나 모든 인간의 영혼에 호소하는 보편적인 울림을 지니고 있는 예술품들이기 때문이다.  

 산탄젤로 다리에서 성 베드로 성당을 바라보며, 저자 정장진 


베드로의 발에 입을 맞추는 사람들

성 베드로 성당 안, 청동으로 만든 베드로 상의 발은 반짝반짝 윤이 나며 엄지발가락에는 발톱이 없다. 간절한 소망을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며 베드로의 발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바티칸에서는 위를 보라

바티칸에 들어서면 천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프레스코 천장화와 회장벽토인 스투코Stucco로 화려하게 장식된 천장을 올려다보면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교황의 요새, 성 천사의 성

산탄젤로Sant’Angelo 성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과거 교황의 요새였던 곳. 이곳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바티칸 시의 전경이 볼 만하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걸작들인 난간 위의 천사상을 따라 성 천사의 다리를 건너면 성 천사의 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바티칸 박물관의 나선형 계단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면 독특한 모양의 나선형 계단을 지나야 한다. 주세페 모모가 설계한 계단을 내려오면서 많은 이들은 다시 속세로 내려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티칸을 말하다, 바티칸 대표 아이콘

Icon

천국의 열쇠, 바티칸 / 성스러운 문, 포르타 산타 / 바티칸의 스위스 용병들 / 로마에서 가장 거대한 돔 / 성 베드로 광장에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있는 까닭

많은 사람들이‘로마에 바티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틀린 생각이다. 우선 바티칸은 이탈리아와 동등한 독립 국가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가톨릭의 출발점으로서 바티칸은 영적으로‘모든 나라 위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즉 로마 위에 바티칸이 있는 것이다. 가톨릭이라는 말의 어원 자체도 보편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바티칸의 아이콘들은 이러한 상징성에서 나온다.

성 베드로 광장에 발을 디디면,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받은 거대한‘천국의 열쇠’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거대한 광장은 열쇠의 손잡이이며, 성 베드로 상이 있는 계단을 올라 성당으로 들어가면 천국과 맞물리는 열쇠의 몸통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성당에 들어서면 모두들 잠시 옷깃을 여민다. 신앙이 없어도 웅장하고 아름다워서 자연히 그렇게 된다. 손때 묻은 허름한 시골 예배당이 더 영적인 곳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창세기에서 시작해 묵시록에서 끝나는 기독교 세계관이 구현된 곳이 성 베드로 성당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이곳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또한 바티칸은 성서 번역과 해석을 통해 전 세계에 문자를 보급하고 지식을 전파한 곳이기도 하다. 뿐만인가? 음악도, 미술도,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도 모두 바티칸에서 시작되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베르니니의 바티칸은 매혹적인 완벽함으로 바티칸을 찾는 이들을 전율케 한다. 이들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많은 여인들이 조각에 손을 대고, 베드로 상의 발에 입을 맞추며 기도를 드릴 때 아무도 그 조각을 우상이라고 하지 않으며 여인들의 기도를 미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티칸은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하나가 되는 공간인 것이다


THE KEY OF THE KINGDOM

천국의 열쇠, 바티칸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노니……”12사도 중 한 사람인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건네받은 인물이다.

성 베드로 성당은 예수가 생전에 했던 말 그대로 베드로의 묘가 있는 자리에 세워졌으며, 베드로가 받은 천국의 열쇠 형상을 하고 있다. 성 베드로 성당 자체가 곧 천국의 열쇠인 것이다. 성당 건물만 보면 십자가 형태이지만, 열주 회랑으로 둘러싼 원형 광장과 합해 지면 열쇠 모양이 된다. 성 베드로 성당의 돔 위에 오르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열쇠는 베드로의 상징이기도 하다. 성 베드로 성당 안팎의 베드로 조각들을 비롯해 수많은 그림 속에서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THE HOLY DOOR

성스러운 문, 포르타 산타

‘포르타 산타Porta Santa’는 성년에만 열리는 성스러운 문을 지칭하는 이탈리아 어이다. 성 베드로 성당 입구에 있는 다섯 개의 문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이 문에는 예수의 일생을 묘사한 16개의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이 문은 오직 교황만이 열고 닫을 수 있는데, 문이 열리는 성년은 25년마다 돌아오는 대사면의 해를 지칭한다. 특별히 기념할 일이 있을 때 교황이 별도로 특별 성년을 선언하면 문이 열리기도 한다. 1933년은 예수 그리스도가 33년 33세의 나이로 죽었음을 기리기 위해 특별 성년으로 지정되었는데, 이어 1983년에도 50주년을 기념해 문이 열렸었다. 


VATICAN’S SWISS GUARDS

바티칸의 스위스 용병들

‘성 베드로 성당 주변으로 피에로 같은 복장을 한 채 무거워 보이는 언월도를 들고 서 있는 꽃미남들을 보게 된다. 바티칸에서 유로화로 월급을 받는 이들은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바티칸 근위대원이다

 체격과 나이 등 까다로운 기준을 거쳐 선발 되며, 스위스 군 출신이어야만 한다. 고대 로마의 군 조직을 모방해 총 1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527년 5월 6일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로마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을 당시, 스위스 근위대원들은 목숨을 던져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사수했고, 덕분에 교황은 무사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전설적인 무훈을 기리기 위해 지금도 창설기념일 대신 충성서약일로 선포된 5월 6일에 대대적인 기념식을 갖는다.

충성서약을 할 때면 모든 근위대원들이 왼손으로는 근위대 기를 붙잡고 오른손을 들어 성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기호인 손가락 세 개를 펴보인다.


THE BIGGEST DOME

로마에서 가장 거대한 돔

성 베드로 성당의 중앙 돔은 로마에 있는 돔 중 가장 크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마치 성당 건물 전체가 이 거대한 돔을 지탱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처음 돔의 설계를 맡았던 브라만테는 판테온 신전을 모방한 돔을 만들고자 했다. 이후 미켈란젤로의 손을 거치면서 돔의 크기는 더욱 확대되었고, 1593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가 이를 완공했다. 바닥에서 돔 꼭대기 까지의 높이는 136m에 이른다. 돔을 받치는 기둥 상단부에는 지름 8m의 원형 액자가 있는데, 이 안에는 4명의 복음서 기자들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너를 베드로라 부르니, 그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너에게 천국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노라.” 라는 뜻의 라틴 어가 금박으로 새겨진 것도 볼 수 있다. 돔 꼭대기에는 테라스가 있어,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돔 위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무척 아름답다.


THE OBELISK

성 베드로 광장에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있는 까닭

파리, 뉴욕, 런던, 로마 등 세계의 주요 대도시에는 어김없이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기독교 본산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도 이 오벨리스크를 볼 수 있는데, 유대인을 노예로 부렸던 이집트의 기념물이 바티칸에 있다는 사실이 언뜻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 교황이 유럽 전체를 지배했던 왕 중의 왕이었음을 떠올리면 국력과 전승을 상징하기 위해 오벨리스크가 필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세기 이집트 주재 로마 총독을 위해 이집트에서 선물한 것이었는데,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으로 현재의 광장에 세워 졌다. 1585년 9월 10일, 성 베드로 광장에 오벨리스크를 세우기 위해 약 800명의 인부와 75마리의 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오벨리스크 끝에는 예수가 못 박혀 죽은 십자가 조각이 보관 되어 있다

모두들 위를 본다. <천지창조>를 보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정면에 있는 <최후의 심판>을 외면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Itinerar

Know-how to Explore the Vatican

바티칸 관람 요령 및 추천 일정 

MUST 바티칸 편은 관람 일정에 2~3시간의 여유 밖에 없는 사람부터 이틀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사람까지 누구나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MUST를 활용해 바티칸을 좀 더 쉽고 알차게 관람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Itinerary+

|일정별 관람 요령|

관람시간 2~3시간 이내 <MASTERPIECE>의 관람 순서를 참고한다

바티칸 관람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두세 시간뿐이라면 대표작품을 중심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이 경우에는 먼저 관람할 작품과 위치를 미리 파악한 후 돌아보는 것이 필수이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인 만큼 바티칸 박물관은 물론, 성 베드로 성당과 광장, 시스티나 성당, 정원 등 보아야 할 작품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MUST의 <MASTERPIECE>를 참조하면 가장 쉽고 빠르게 바티칸의 대표작품을 둘러볼 수 있다. <MASTERPIECE>에서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작해, 성 베드로 성당,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박물관의 주요 작품을 선정해 건축과 조각, 회화에 이르기까지 바티칸의 다양한 예술품을 두루 훑어볼 수 있도록 했다.

관람시간 3시간~반나절 <THEME>에서 관심 있는 주제를 관람 루트에 추가한다. 

관람 일정에 보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THEME>를 미리 읽으면 보다 알차게 관람할 수 있다. <THEME>의 주제들을 통해 바티칸 시국의 상징성과 교황 등 생소한 개념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으며, 바티칸이 서구 예술에서 지닌 의미를 파악하며 관람할 수 있다. 반나절 정도의 여유가 있을 때는 <THEME>에서 다루고 있는 각각의 주제를 하나의 관람 루트로 이용하거나, 이 중에서 관심 있는 작품만 골라 <MASTERPIECE>의 루트에 추가해도 좋다. 

관람시간 1일 이상 <COLLECTION>에서 관심 있는 작품을 찾아본다

더 많은 작품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COLLECTION>을 참고한다. <COLLECTION>에서는 바티칸 박물관의 나머지 작품들을 주제별·관별로 정리해 두었다. 각 작품의 사진과 함께 핵심적인 작품 해설을 곁들여, 직접 보지 않고도 바티칸 박물관의 작품 컬렉션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Itinerary++

|바티칸 관람 전 알아둬야 할 8가지| 

1. 바티칸 관람은 크게 성 베드로 성당과 광장,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정원의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시스티나 성당은 바티칸 박물관과 이어져 있어, 일반적으로 바티칸 박물관의 마지막 순서에 시스티나 성당을 관람하게 된다. 정원은 벨베데레 정원과 솔방울 정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예약을 통한 유료 입장만 가능하다.

2. 바티칸을 제외한 로마 대부분의 박물관이 휴관인 월요일에 바티칸 관람객이 많은 편이며, 무료 입장일인 매월 마지막 일요일이 가장 붐빈다. 오전에 바티칸 박물관을 관람한 후 오후에 성 베드로 성당을 관람하는 코스가 일반적이지만, 개관시간인 오전 9시 이전에 도착하지 않는 한 입장 시 평균 2시간씩 줄을 서 기다려야 하므로, 반대로 오전에 성 베드로 광장과 성당부터 관람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3. 성 베드로 광장과 성당은 건축과 조각이 전부 주요 볼거리이다. 성당 돔에 오르면 바티칸 정원과 로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오전보다는 오후에 올라가는 것이 좋다. 

4. 바티칸 박물관은 상당히 복잡한 건물이므로, 관람 전에 동선을 파악해 두어야 이동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유물은 박물관 2, 3층에 소장되어 있으며, 라파엘로의 그림들,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 고대 이집트 유물, 르네상스와 바로크 회화, 고지도 등은 별도의 명칭이 부여된 각각의 전시실에 소장되어 있다.

5. 바티칸 박물관에 입장한 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가면 양 갈래로 길이 나뉘어진다. 회화실인 피나코 테카가 있는 오른쪽부터 먼저 관람한 후, 왼쪽으로 이동해 이집트관, 피오 클레멘티노관 등을 관람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다. 솔방울 정원, <라오콘> 등의 고대 조각이 모여 있는 벨베데레의 안뜰, 피오 클레멘티노관, 이집트관 등 2층의 전시실들을 차례로 둘러본 후 3층으로 올라간다.

6. 3층에는 태피스트리관, 지도관, 라파엘로관 등이 있다. 4개의 작은 전시실로 이루어진 라파엘로관에서는 <아테네 학당>, <성체 논쟁> 등 라파엘로가 그린 르네상스 최고의 그림들을 볼 수 있다.

7. 라파엘로관을 관람한 후 계단을 내려가면 시스티나 성당으로 통한다. 이곳에서 미켈란젤로의 걸작 <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를 비롯해 페루지노, 보티첼리 등이 그린 12점의 르네상스 회화들을 감상한다.

8. 바티칸 박물관의 출구는 두 곳이다. 주세페 모모가 만든 나선형 계단은 입구 쪽에 있으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가려면 시스티나 성당 쪽으로 나 있는 출구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바티칸에서 꼭 봐야 할 작품

Masterpiece

01. 성 베드로 광장 / 02. 피에타 / 03. 성 베드로의 옥좌 / 04. 주 제단의 천개 / 05. 벨베데레의 아폴론 / 06. 라오콘 / 07. 아테네의 학당 / 08. 성체 논쟁 / 09. 베드로의 탈출 / 10. 천지창조 / 11. 최후의 심판

바티칸의 모든 것은 하나의 표준이자 모델이다. 즉 모든 것이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성 베드로 광장도, 성당도, 그 안에 있는 조각도 모두 모방할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서양의 모든 예술가들이 로마를 방문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단 화가, 조각가들만이 아니라 괴테, 스탕달 같은 작가들도 로마를 찾았다

바티칸에 기독교 미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과 이집트 유물도 있고, 중세와 르네상스의 성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크 양식의 미술품들이 많다. 먼 옛날 수도승과 사제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유일한 지식인들이었고, 자연히 이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책도 잘 알고 있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기독교 사제들이 보기에는 조물주의 섭리를 드러내는 이들로 간주되었고, 르네상스 당시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기독교의 신의 섭리를 연결시키려고 했으며, 나아가 비너스와 성모를 같은 존재로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고대 그리스 조각이자 간다라 미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쳐 동양에서 불상 제작 시 모델이 되기도 했던 <벨베데레의 아폴론> 상으로부터 인물의 포즈와 얼굴 모습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다. 이처럼 바티칸은 성소인 동시에 거대한 박물관이자 미술관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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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건축>

성 베드로 광장 (Piazza San Pietro)

Piazza San Pietro

성 베드로 광장

세상을 품에 안은 광장

종교 건축은 늘 깊은 상징성을 갖고 있다. 성 베드로 광장과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열주 회랑 역시 예외가 아니다. 위에서 보면 열쇠 모양을 하고 있어서 초대 교황인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받은 천국의 열쇠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모 마리아가 두 팔을 벌려 세상을 끌어안는 형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경우 광장 좌우에 하나씩 놓여있는 두 개의 분수는 성유, 즉 성모의 두 젖가슴을 상징하며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그려진 그림인‘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돈나’의 건축적 변형인 셈이다. 

건축가이자 조각가였던 베르니니가 성당 앞 광장과 이를 에워싼 열주 회랑을 완성한 것은 성당이 완공된 지 70여 년이 지난 1667년이었다. 무려 284개의 도리아식 기둥들이 4열로 늘어선 이 둥근 회랑 위에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제작한 140명의 성자와 순교자 조각이 올라가 있는데, 조각의 크기가 모두 3m를 넘는다. 원의 중심에 해당하는 광장 한가운데에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고, 좌우로 베르니니와 마데르노가 만든 분수가 자리잡고 있다. 성 베드로 광장의 분수는 파리 콩코드 광장의 분수를 비롯해 세계 여러 도시에 있는 분수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물이 부족한 로마에서 분수는 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 이외에도, 성유의 상징성과 더불어 기독교의 세례와 관련된 종교적 의미 역시 함축하고 있다.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원래 네로 황제의 경기장에 있던 것을 1586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오벨리스크 끝에는 예수가 못 박혀 죽은 십자가 조각이 보관되어 있다. 첨탑인 오벨리스크로 인해 성 베드로 광장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데, 다름 아니라 오벨리스크의 그림자로 인해 광장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해시계가 되는 것이다. 성 베드로 광장처럼 복합적인 상징성을 지닌 건축물은 바로크 양식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광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람들 은 이 상징과 의미들의 건축적 수사학 속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광장에서 가장 긴 부분은 길이가 196m에 달한다.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원은 중심에 가까이 올수록 낮아 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기에 서서 열주 회랑의 기둥들을 보면 284개의 기둥이 하나로 겹쳐 보이는데, 이는 기둥 간 거리를 동일하게 하는 대신, 밖으로 갈수록 두께가 두꺼운 기둥을 세운 베르니니의 설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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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조각>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4-1564), 1500, 대리석, 174x69cm 성 베드로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Pietà

피에타

슬프도록 아름다운 걸작

성 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조각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피에타> 앞에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안타 깝게도 1972년 한 정신병자가 조각에 손상을 입힌 이후 방탄 유리가 설치되어 가까이 접근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피에타’ 는 경건 혹은 동정심을 뜻하는 말로, 예수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표현한 모든 예술 작품을 일컫는다. 이 작품을 완성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고작 25살의 젊은 청년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해 다른 사람이 조각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에 격분한 미켈란젤로는 작품에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고, 이렇게 해서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들어간 유일한 작품이 되었다. 원래 1498년 프랑스 주교가 자신의 묘를 장식하기 위해 주문한 작품이었으나, 1519년 성 베드로 성당에 들어왔다. 막 숨을 거둔 예수의 육체는 힘없이 늘어진 팔, 눈을 감은 채 뒤로 젖혀진 머리 등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상화된 육체가 아니라 진실에 접근하려고 한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이 엿보인다. 성모와 예수를 실물 크기로 조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성모 마리아가 실제보다 젊게 묘사된 것은 예수의 시신과 살아있는 성모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숨을 거둔 예수의 처연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였다. 다른 많은 <피에타> 조각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두 주인공만을 조각해 단순성과 비장미 또한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앞가슴에는 “MICHAEL. ANGELUS. BONAROTUS. FLORENT. FACIEBAT”, 즉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이 작품을 제작했음” 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글을 써 넣은 이 띠가 없었다면 이 작품은 한층 아름다웠을 것이다. 예술가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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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조각>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 1666, 청동, 대리석, 스투코, 높이 약 20m 성 베드로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Cattedra Perti

성 베드로의 옥좌

베르니니 최고의 걸작

성 베드로가 초대 교황임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성 베드로 성당 내부에서 가장 화려한 이 제단은 바로크 조각가 베르니니의 최고 걸작이다. 밑에는 성 어거스틴을 비롯한 서방과 동방의 4명의 교부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조각들의 크기만 해도 가장 작은 것은 4m 50cm, 큰 것은 5m 50cm에 이른다. 중앙의 원 속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하늘에서 비추는 빛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주위는 구름에 둘러싸인 천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의 날개 길이만 1m 75cm에 달한다. 전체적으로 극적 효과와 역동적인 움직임에 민감했던 조각가 베르니니의 바로크적 취향을 가장 잘 드러낸 걸작이다. 하단의 두 천사는 베드로의 열쇠를 들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교황의 삼중관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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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조각>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 1633, 청동 성 베드로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Baldacchino di San Pietro

주 제단의 천개天蓋

제단을 덮은 화려한 지붕

높이 29m의 이 거대한 제단은 성 베드로 성당의 주 제단으로 베르니니가 만든 또 하나의 걸작이다. 1624년에 시작해 10년 후인 1633년에 완성되었다. 육중한 청동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개방된 공간으로 인해 육중함은 많이 상쇄되고 있다. 하지만 건설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원래 보통 성당의 천개는 이동이 가능하도록 나무와 천으로 만들지만 베르니니는 천개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움직여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생각에 이동이 불가능한 청동으로 만들 었다. 주 제단 밑에는 성 베드로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뒤틀려 있는 기둥은 구약에 나오는 솔로몬 신전의 기둥을 모방한 것이다. 천개의 중심부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묘사되어 있는데, 그 아래가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면서 의식을 행하는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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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조각>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청동상을 로마 시대 모각, 대리석, 224cm

바티칸 박물관, 피오 클레멘티노관, 벨베데레의 안뜰 (Musei Vaticani, Museo Pio-Clementino, Cortile ottagonale del Belvedere)

 Apollo del Belvedere

벨베데레의 아폴론

르네상스 남성상의 모델

흔히 벨베데레의 아폴론으로 불리는 이 유명한 조각은 기원전 4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 청동 조각가 레오카레스의 작품을 서기 2세기경 로마 조각가가 모각한 것이다. 고대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한 뒤, 수많은 그리스 청동, 대리석 조각들을 약탈해 궁전과 저택을 장식하는 데 쓰곤 했다. 물량이 달리자 로마에는 많은 공방이 생겨나고, 전문적인 모각이 유행했는데, 이 모각은 판테온에서 부조 작품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원본으로 간주될 정도로 뛰어난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벨레데레의 아폴론>은 과장되지 않은 인체 묘사의 은밀하고도 육감적인 매력으로 그리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미켈란젤로, 독일 판화가인 뒤러 등을 비롯한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완벽한 인체 비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의 포즈를 모방하곤 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도 벨베데레의 아폴론의 포즈를 그대로 모방한 인물을 찾아볼 수 있다. 벨베데레Belvedere는 전망이 좋은 곳 혹은 그런 곳에 지은 정자를 뜻하는 이탈리아 어이다. 바티칸 벨베데레에 있던 조각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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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조각>

기원전 2세기, 대리석, 242cm

바티칸 박물관, 피오 클레멘티노관, 벨베데레의 안뜰 (Musei Vaticani, Museo Pio-Clementino, Cortile ottagonale del Belvedere)

Laocoon

라오콘

헬리니즘 조각의 정수

티투스 황제의 궁전 인근에서 1506년 한 농부가 발견한 이 조각은 기원전 2세기경 그리스 로도스 섬의 조각가가 제작한 것으로, 아폴론 신의 제사장 라오콘의 비극적 최후를 표현하고 있다. 아폴론 신전에서 부인과 사랑을 나누어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된 라오콘은 아폴론이 풀어놓은 거대한 뱀들이 두 아들을 위협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함께 죽고 만다. 트로이 전쟁 당시, 제사장이었던 라오콘은 트로이 시내로 목마를 들여오는 것에 반대하면서 목마를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었고, 그가 죽자 트로이 시민들은 이를 신의 뜻으로 여기고 목마를 시 안으로 끌어온다. 헬레니즘 시대 조각의 정수가 표현된 이 작품은 발견 즉시 전 유럽의 예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그 후 많은 조각에 영향을 끼친다. 미켈란젤로는 작품을 본 뒤 곧바로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구입을 요청했고, 조각이 바티칸에 들어 오던 날에는 사원의 종이 울리고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예술사가 빙켈만, 독일 비평가이자 극작가 레싱, 괴테 등 많은 예술가 문인들이 이 작품에 대해 긴 글을 쓰며 찬사를 보냈다. 최근에는 이 작품이 기원전 2세기 중엽 그리스 시대의 페르가몬에서 청동으로 제작된 것을 모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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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회화>

산치오 라파엘로(1483-1520), 1509-1511, 프레스코화, 579.5x823.5cm

바티칸 박물관, 라파엘로관, 보르고 화재의 방 (Musei Vaticani, Stanze di Raffaello, Stanza dell’Incendio del Borgo)

Scuola di Atene

아테네 학당

치밀한 구도와 역동적인 인체 표현

교황의 집무실이자 서재에 걸려 있던 작품이다. 4대 학문인 신학, 철학, 법학, 시에 대한 우의적 그림이 그려진 큰 메달 4개가 천장을 장식하고, 벽에는 각 주제를 세부적으로 묘사한 벽화들이 들어가 있다. 그중 <아테네 학당>은 철학을 묘사한 작품으로 성 베드로 성당과 비슷한 공간에 고대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등 54명의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얼굴은 모두 라파엘로가 활동하던 당시의 예술가들의 얼굴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을 한 채 한 손을 들고 이데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철학자 플라톤, 반대로 지상을 가리키며 현실 세계를 논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그 앞 계단 한복판에 푸른색 망토를 깔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디오게네스, 화면 왼쪽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수학자 피타고라스 등을 볼 수 있다. 피타고라스 오른쪽에서 명상에 잠겨 있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그 뒤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도 보인다.

건물의 궁륭 밖으로는 높고 푸른 하늘이 보이며 좌우 벽감에는 칠현금을 든 음악의 신 아폴론 그리고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네의 상이 들어가 있다. 치밀한 원근법에 입각해 그려진 상상화이지만 웅장한 규모와 수많은 인물들을 조화롭게 배치한 구성 등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무대 같은 공간 속에 배치된 인물들은 한결같이 진지하고 숭고한 자태로 등장한다.

이 그림에서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깊이 있는 심리 묘사와 미켈란젤로의 역동적인 인체 표현을 종합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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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회화>

산치오 라파엘로(1483-1520), 1510-1511, 프레스코화

바티칸 박물관, 라파엘로관, 서명의 방 (Musei Vaticani, Stanze di Raffaello, Stanza della Segnatura)

Disputa del SS. Sacramento

성체 논쟁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고리

예수의 성체 상징을 두고 좌우에서 교부와 교황들이 마치 서로 성체를 차지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붙여진 제목인데, 사실은 그림의 주제를 오해해 잘못 붙여진 이름이다. 예수의 성체가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고리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천상의 가장 높은 곳에는 성부가 있고, 그 밑에 동정녀 마리아와 세례 요한을 좌우에 거느린 성자 예수가 있으며, 그 밑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나머지 인물들은 순교자, 예언자, 사도들이다. 지상에는 성체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월계관을 쓴 단테가 보이며, 르네상스 당시 피렌체의 사제로 영적 부흥을 부르짖다 죽음을 당한 사보나롤라, 수도승이자 화가였던 프라 안젤리코 등의 모습도 보인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아테네 학당> 보다 더 걸작으로 간주하기도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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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회화>

산치오 라파엘로(1483-1520), 1514, 프레스코화

바티칸 박물관, 라파엘로관, 엘리오도로의 방 (Musei Vaticani, Stanze di Raffaello, Stanza di Eliodoro)

Liberazione di San Pietro

베드로의 탈출

카라바조와 렘브란트를 예고하는 걸작

베드로가 로마의 감옥에 갇히자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구출해내는 신약 성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 속 주인공인 성 베드로는 교황을 상징하는 인물로, 이는 곧 아무리 교황에 대한 탄압과 압박이 있어도 신의 손길이 그를 향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메시지 외에도 극적인 구성과 초월적인 신성을 나타내는 빛과 어둠의 대비 등으로 인해 카라바조와 렘브란트를 예고하는 선구자적인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가 묶여있던 사슬은 오늘날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사슬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콜로세움 인근에 있는 이 성당은 프로이트의 해석으로 유명해진 미켈란젤로의 걸작 <모세> 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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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회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4-1564), 1508-1512, 프레스코화, 40.5x13.2m

시스티나 성당 (Cappella Sistina)

Genesi

천지창조

고된 창작의 고통 끝에 탄생한 대작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다. 프레스코Fresco는 이탈리아 어로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색을 칠하는 기법을 의미한다. 신속하게 그려야 하고, 그린 뒤에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뛰어난 감각과 재능이 없으면 그리기 힘든 장르에 속한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시스티나 성당의 단순하고 지루한 천장을 다른 그림으로 대체할 생각으로 미켈란젤로에게 작업을 일임한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화가라기 보다 조각가로 유명했지만, 다른 화가들이 예술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며 음해하자, 선뜻 교황의 주문을 승낙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이 과제에 매달리게 된다. 처음에는 12사도를 묘사하는 단순한 그림을 생각했지만, 당시 신학자들을 만나 논의를 하고 조언을 구한 끝에 구약의 <창세기>와 <열왕기>에 등장하는 광대한 기독교의 신화적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평면이 아닌 둥근 천장이 었기 때문에, 중앙의 <창세기>와 좌우의 <열왕기>만으로는 전체 천장을 다 채울 수가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이런 이유로 예언서로 분류되는 구약의 다른 성경들을 참조하며 천장과 벽이 만나는 공간을 채워야만 했다.

단 한 명의 조수도 두지 않고 3년 남짓 작업에 매달린 끝에 마침내 1512년 11월 1일, 모든 예술사가들이 인정하는 서구 회화의 최대 걸작인 <천지창조>가 완성된다. 미켈란젤로는 전체 구성을 가다듬고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세부를 변경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데생과 습작을 해야만 했다. 그림은 받침대를 타고 올라가 등을 대고 드러누운 상태에서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그려야만 했다. 천장 중앙에는 구약 성서의 <창세기>, 그 주위로 <12명의 무녀와 예언자>, 삼각형 모양의 벽과 반원형 벽면에 <그리스도의 조상> 그리고 네 모퉁이에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각각 그려졌다. 수백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 미켈란젤로의 역동적인 육체 묘사와 그의 종교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의 영향을 받지 않은 화가가 없을 만큼, 서구 회화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걸작 중의 걸작이다. 로댕은 “나를 돌을 깎는 석공에서 예술가로 만들어 준 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후일 여러 번의 덧칠과 복원을 거듭해 밝고 웅장한 원작의 느낌이 많이 훼손되었다가, 1982년 일본의 한 방송사 후원으로 체계적인 복원 작업을 통해 원래의 휘황찬란함을 되찾았다.


<아담의 창조>

아담의 창조

<천지창조>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천장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아담의 창조>다. 영화 에도 사용된 적이 있고 광고에도 여러 번 활용될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다. 신이 만물을 창조한 뒤, 마지막으로 흙으로 아담을 빚은 다음 코로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구약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코를 통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장면 대신 신이 손을 뻗어 아담의 손을 잡으려는 장면이 등장한다. 미켈란젤로가 손으로 작업을 하는 조각가였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다. 미켈란젤로는 신을 최초의 조각가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림을 통해 나타낸 것이다. 또 하나 <아담의 창조>에서 흥미로운 것은 건장한 체구에 비해 보잘것없이 작고 축 늘어진 모양으로 묘사된 아담의 성기다. 이는 아직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몸에 어떤 생식 기능이나 에로티시즘이 깃들지 않았다는 것을 일러준다.


<원죄>

원죄

<천지창조>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작품은 <원죄>를 묘사한 작품이다. 이브가 사탄으로부터 선악과를 건네 받고 있는 장면과 신의 진노를 사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는 두 장면이 동시에 묘사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다름 아니라, 뱀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사탄이 여성의 몸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림에서 길게 묘사된 하체 전체가 드러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분명하게 여성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남녀자웅동체 등이 거론되며, 미켈란젤로의 신학에 대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웅장한 종교 서사시와 뛰어난 인체 묘사, 유대주의와 헬레니즘의 만남

<천지창조>는 서구 회화사 최고의 걸작이기는 하지만, 천장에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감상하기 힘든 작품이기도 하다. 등이 휠 정도로 그림을 그린 사람도 있었으니, 감상을 하는 어려움 정도는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한참 동안 천장을 쳐다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서는 많은 이들의 손에는 천장의 그림을 확인 할 수 있는 안내 책자나 도판이 들려 있게 마련이다.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웅대한 서사시를 연상하게 하는 전체적인 구도이다. 한 두 작품이 아니라 수십 점의 작품들로 이루어진 연작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 결코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성부를 대담하게 묘사한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천지창조>의 인체 묘사는 미학적으로 그리스 로마의 조각으로부터 왔다. 유대 민족은 양을 키우며 방랑하는 민족이었고, 종교적으로도 우상 숭배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각은 물론이고 그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천지창조>는 미학적으로 유대 민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작품인 것이다. 다시 말해, 르네상스 인이었던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그리스 고전주의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히브리 민족의 대서사시가 함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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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세상스 회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4-1564), 1534-1541, 프레스코화, 13.7x12.2m

시스티나 성당 (Cappella Sistina)

Giudizio Universale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의 경건한 신앙 고백

1534년 미켈란젤로는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위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라는 명을 받는다. 클레 멘스 7세는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등 재난이 계속되자, 성소를 침범한 이들에게 신의 심판을 내세워 겁을 주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교황의 사망으로 작업은 잠시 중단되었으나,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3 세의 의뢰로 1535년 작업이 재개된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541년, 면적 200㎡의 벽면에 391명의 인물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모습을 취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작품 역시 <천지창조>와 마찬가지로 수십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작으로,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천상의 세계, 나팔을 부는 천사들, 사자들의 부활, 승천하는 자들, 지옥으로 끌려가는 무리 등 5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그림의 액자부터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상단부가 두 개의 아치 형태로 되어있는 그림의 형태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았던 율법판의 형태와 똑같다. 그리고 그 끝은 <천지창조>와 닿아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연이 아니라 두 대작을 연결 하고 모세에서 메시아 예수로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와 모세와 심판자로 재림하는 예수를 연결시키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품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휴거가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다. 그림 밑에는 지옥으로 끌려가는 가련한 인간들이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시간 순서를 따라 서술된 <천지창 조>와는 달리 <최후의 심판>에서는 시간이 무너져 내리고 죄의 경중에 따라 모든 인간이 한 공간에 모여있다. 죄가 가벼운 인간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있으며 무거운 죄를 진 사람들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림 하단에는 땅을 향해 힘차게 나팔을 불고 있는 인간들과 큰 책을 넘기는 인간이 보인다. 계시록의 예언대로 심판의 날이 시작되었음을 표현하고 있 는 것이다. 그림의 정중앙에 있는 예수와 성모는 모든 인간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특히, 예수 주위로는 기독교 역사를 빛낸 순교자들이 가득 둘러싸고 있다. 이들은 모두 깜짝 놀란 듯한 제스처를 보이며 손을 내밀거나 든 채로 무언가 말을 하고 있으며, 예수는 한 팔을 들어 그들이 하는 말을 물리치며 조용히 하라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이제 곧 예수의 입에서 천년 왕국이 선포될 찰나인 것이다. 그림이 처음으로 선을 보인 1541년, 로마 시민들은 이전의 고전적 천장화와는 달리 격렬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이 그림 앞에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끼면서 경악했다. 무엇보다 작품 속의 인물이 모두 나체라는 점이 가장 큰 논란이 되었다. 후일 생식기 부분을 가리기 위해 덧칠 작업이 이루어 졌으나, 최근에는 다시 화학약품을 이용해 벽화에 가해진 덧칠, 그을음, 때를 씻어내는 작업이 완료되어 그동안 가려지 고 벗겨져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최후의 심판> 관람 요령

1. 젊고 당당한 체구의 청년으로 묘사된 최후의 심판자 예수는 <벨베데레의 아폴론> 상을 모방해서 그려졌다.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 로마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고전적 완벽함을 보여주는 그리스 조각은 당시 조각가들에게 따라야 할 모델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벨베데레의 아폴론> 상을 모방해 남성상을 조각하곤 했다.

2. 1536년에 시작해 1541년에 완성된 <최후의 심판>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전 유럽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던 때에 그려진 그림이다. 1508년부터 1511년 사이에 그려진 <천지창조>의 밝고 힘찬 낙관주의와 <최후의 심판>의 어둡고 종말론적인 분위기의 차이는 여기서 나온다.  

3. 예수의 왼발 밑에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자신의 가죽을 들고 있는 노인은 성 바르톨로메오다.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이었던 바르톨로메오는 전설에 의하면 산 채로 피부를 벗기는 형벌로 순교했다고 한다. 그림 속에서 그가 들고 있는 가죽은 이 일화를 묘사한 것인데, 미켈란젤로는 가죽의 얼굴 부분에 사도가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이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4. 바르톨로메오 오른쪽 위에서 한 손에는 황금 열쇠를, 다른 손에는 쇠 열쇠를 들고 있는 인물은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 이다. 두 열쇠는 각각 천국의 열쇠와 지상의 열쇠를 상장한다.

5. 마리아 옆에 십자가를 들고 있는 인물은 12사도 중 한 사람인 안드레이다. 그리스에서 포교를 하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해 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며, 흔히‘십자가의 안드레’로 불리는 성자다. 

6. 안드레의 아래쪽에서, 사다리처럼 생긴 석쇠를 어깨에 메고 있는 이는 스페인 태생으로 로마 부주교를 지낸 산 로렌초이다. 부주교를 지내다 258년 불에 달구어진 석쇠에 올라가 화형을 당하고 만다. 전설에 의하면 성당에 있는 보물을 내놓으라고 하자 성당에 모여있던 가난한 불구자들을 보여주며 여기에 보물들이 있으니 다 가져가라고 했다고 한다. 베드로의 열쇠, 바르톨로메오의 벗겨진 피부, 안드레의 십자가 등은 각 성자를 묘사할 때 꼭 함께 등장하는 요소 이다.  

7. 그림 가장 밑부분에는 천벌을 받은 인간들을 지옥으로 실어 나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죽은 자를 저승으로 건네주는 뱃사공 카론이 기독교의 악마로 분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트롬본 같은 악기를 불고 있는 장면은 신약 마지막 부분인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묘사한 것이다.

테마로 보는 바티칸의 작품들 1

Theme

다양한 유물과 작품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 유사성이 진정한 의미의 테마다. 작품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 혹은 테마는 하나의 선이나 색일 수도 있고, 또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으며, 새로운 것을 향한 열망일 수도 있다. 바티칸의 테마가 신앙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티칸에 발을 들여놓으면 영적으로 예민해진다. 모든 것이 이 신앙이라는 테마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 교황이었던 성 베드로의 이름을 따라‘성 베드로 성당’이라 지칭하고 있고, 그가 받은 천국의 열쇠는 바티칸 의 상징이자 키워드이다. 바티칸의 테마인 신앙은 건물, 벽화, 성화 등 예술로 표현된 신앙이다. 특히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두드러지게 적용되어 있다. 이 예술품들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과거의 욕심 많은 교황들이 주문한 것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교양과 학식을 두루 갖춘 교황의 후원으로 제작된 것들이기도 하다. 르네상스가 절제와 균형을 보여준다면, 뒤를 이은 바로크는 정반대의 경향을 보인다. 역동적인 움직임, 신비감을 자아내는 색과 구도들은 작품 앞에 선 사람들에게 잠시 무아지경의 황홀감을 선사한다. 바로크는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을 거치며 모든 성상화를 거부했던 프로테스탄티즘으로부터 가톨릭을 옹호하기 위해 고안된 미술 양식이기 때문에 때론 너무 지나쳐서 쉽게 싫증이 나기도 한다.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조각가가 바로 성 베드로 광장과 성당 내부의 주 제단을 만든 베르니니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은 정화 운동을 펼쳤고, 그 결과가 신앙에 학문적 교양과 지식을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자연히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들이 유입되어 박물관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유대 민족이 노예로 끌려가 살았던 이집트의 유물들도 소장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현대 종교미술도 전시하고 있다.


THEME > 천국의 열쇠를 찾아라

THE KEY OF THE KINGDOM


반석이자 천국의 열쇠인 베드로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 하리라.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노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 


신약의 마태복음에 나오는 구절로, 성 베드로 성당은 이 말에 따라 베드로의 묘가 있는 곳에 세워졌다. 성당 곳곳에서 예수로부터 받은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상을 볼 수 있으며, 시스티나 성당 벽화에서도, 바티칸 시국의 문장 속에서도 이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또 하나의 열쇠는 다름 아닌 성당 그 자체다. 하늘에서 보면 성당 전체가 열쇠 형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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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성당 입구의 베드로

성 베드로 광장을 지나 성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계단 좌측에 열쇠를 들고 있는 성 베드로 상이 서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둘러 성당 안으로 들어가느라 이를 무심히 스쳐 지나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현재 베드로의 묘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성당인 만큼 베드로 상이 지닌 상징성은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베드로가 들고 있는 열쇠는 눈여겨 봐야 한다. 이 조각상에 묘사된 베드로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긴 두루마리 옷을 입고 한 손에는 문서 다발을,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황금 열쇠를 쥐고 있다. 문서 다발은 신약에 나오는 베드로서를 상징하고, 열쇠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준 천국의 열쇠다.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의 일부, 피에트로 페루지노(1445-1523), 1481-1482, 프레스코화, 335x550cm 시스티나 성당 (Cappella Sistina)

<최후의 심판>의 일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4-1564), 1534-1541, 프레스코화, 1370x1220cm 시스티나 성당 (Cappella Sis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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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열쇠는 왜 두 개일까?

성 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베드로 상과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을 비롯해 여러 조각상이나 회화 작품에서 이 열쇠는 베드로의 상징처럼 등장하곤 한다. 베드로를 그린 그림 가운데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Perugino가 그린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는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벽에 그려진 이 프레스코 벽화는 미켈란젤로의 대작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지만, 서구 미술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원근법, 인물, 건축의 조화 그리고 이야기를 회화의 공간 속에 서술하는 기법 등이 모두 페루지노로부터 나왔으며, 제자 라파엘로는 이 그림과 거의 똑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정확한 원근법으로 그려진 그림 전면에는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로부터 열쇠를 받는 베드로가 묘사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열쇠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티칸 성당 앞에 있는 베드로 상 또한 두 개의 열쇠를 포개서 들고 있는데, 이처럼 열쇠가 두 개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마태복음에 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는 성서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은 두 개의 열쇠를 통해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한 지상과 천국의 약속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PHOTO_ 성 베드로 성당 안의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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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상에서 발가락이 사라진 까닭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모든 베드로 상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조각은 13세기 말에 제작된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이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180cm의 이 청동 조각에서도 베드로는 어김없이 두 벌의 열쇠를 쥐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열쇠를 들고 있는 왼쪽 팔이 마치 골절상을 입은 듯이 붕대 속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베드로는 골절을 당하지 않았고 조각에서 왼쪽 팔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붕대가 아니라 긴 옷자락이다. 이는 곧 베드로가 열쇠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소중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묘사한 것인데, 그래서인지 열쇠를 가슴 한가운데에 모아서 소중하게 들고 있다.

교황은 미사를 집전할 때 이 조각을 찾아와 발에 입을 맞추곤 한다. 뿐만 아니라 성당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받침대 밖으로 나와있는 베드로의 발에 입을 맞추곤 한다. 때론 오랫동안 손으로 잡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서인지 다 닳아서 발가락의 구분이 없어져 버렸다. 만일 열쇠를 조각에서처럼 한 손으로 움켜쥐고 그 손을 옷자락 속에 넣지 않았다면 누군가 열쇠를 가져갔을지도 모른다. 발가락이 뭉개질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맞춘 베드로의 발을 보면 베드로가 열쇠를 움켜쥐고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베드로의 제스처와 표정이 마치“열쇠만은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성당의 문고리나 예수의 손이 닳아 없어지거나 도난을 당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곤 한다. 


<베드로의 순교> 카라바조(1571-1610), 1600, 캔버스에 유채, 230x175cm,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THEME > 바티칸 잔혹사

THE VATICAN’S CRUEL HISTORY

바티칸, 굴욕의 순간들

세계 기독교의 총 본산인 바티칸에는 영광의 날도 많았지만, 굴욕의 순간도 많았다. 초대 교황으로 추대된 성 베드로가 순교를 하면서 시작된 바티칸 역사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이 영욕의 역사는 바티칸 잔혹사로 불러도 무방할 만큼 온갖 잔인하고 끔찍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바티칸 역사의 중요 사건들을 살펴보면 바티칸과 교황의 의미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성 베드로 성당과 박물관 관람이 한층 흥미롭다.


<교황 포르모수스와 스테파누스 7세> 장 폴 로렌(1838-1931), 1870, 캔버스에 유채, 100x152cm, 낭트 보자르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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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재판

897년, 새로 교황 자리에 오른 스테파누스 6세는 타락한 로마인들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자신을 물리치고 교황 자리에 올랐던 전임 교황 포르모수스가 죽자 10개월이 지난 시신을 파내어 옷을 입힌 채로 공의회를 소집해 시신 재판을 열었다. 당대의 증언들이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 이‘엽기적인 사건’은 교황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한 세기 동안 교황과 반대파가 옹립한 44명의 대립교황이 즉위했고, 이 중 9명은 암살당했으며 7명은 중도에 폐위되었다. 이 시기를 이른바‘창녀 정치’시대라고 부르는데, 로마의 한 가문의 여인들이 권력을 쥐락펴락했기 때문이다. 유부녀의 침대 속에서 암살당한 교황, 돈을 받고 교황권을 넘긴 교황도 생겨났다. 정부를 두는 것은 예사였고, 사생아 신분의 아들을 조카로 둔갑시켜 평생 가까이에 두고 출세 시킨 교황도 있었다. 물론 사악하고 타락한 교황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품이 어질고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교황들이 많이 있었기에 오늘날 까지 바티칸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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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귀를 맞은 교황과 아비뇽 유수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은 신성로마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느냐, 아니면 교황이 황제를 임명하느냐의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서임권 투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유럽 중세사를 피로 물들이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서로 파문과 폐위를 외치며 맞섰다. 11세기 말에는 자신의 약세를 인정한 황제가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 성에 있던 교황을 찾아가 추운 겨울 맨발로 3일간 용서를 빌었던 일명‘카노사의 굴욕’이라 부르는 사건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교황이 승리한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교황의 권위 역시 언제든지 도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 후 약 200년이 흐른 1303년, 프랑스 왕 필립의 위협에 시달리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이탈리아 아나니의 한 성에 피신해 있다가 성에 난입한 필립의 부하들에게 따귀를 맞는 굴욕을 당한다. 교황은 이 충격으로 며칠 후 숨을 거두고 만다. 이러한 사건들은 교황권의 시련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교황이 따귀를 맞는 굴욕을 당한 이후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 자리에 들어서자 교황궁을 아예 로마에서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버렸다. 흔히 세계사에서‘아비뇽의 유수’로 불리는 이 사건의 본질 역시 황제권과 교황권의 갈등에 있었다. 약 70년 동안 진행된 이 아비뇽의 유수는 바티칸 잔혹사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현재 프랑스 남쪽 지방에 있는 아비뇽에 가면 옛 교황궁을 볼 수 있다.


PHOTO_ 바티칸에서 열린 이탈리아 주교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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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대제의 로마 침공

“5월 6일, 우리는 로마를 공격해서 6천 명 이상을 죽이고, 전 도시를 약탈했으며 모든 교회와 집에 있는 것들을 가져갔고, 도시의 대부분을 불태 웠다.”1527년 카를 대제가 로마를 공격할 때 함께 했던 한 지휘관이 후일 고백한 글이다. 남부 독일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루터파 신교도라는 이유로 박해했던 교황권에 반기를 들고 신성로마 황제의 출정명령에 기꺼이 따랐다. 대부분 민간인이었던 이들은 군복도 입지 않은 채 전쟁에 참가했는데, 당시 로마는 베네치아 다음으로 부자들이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점령하면 한몫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다. 교황을 지키기 위해 스위스 용병들로 구성된 근위대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카를 대제의 군대를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 전원 전사한다. 이 카를 대제의 로마 침공과 약탈은 피렌체와 로마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에 종지부를 찍은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 파괴된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라파엘로를 따르던 제자들도 모두 떠나버렸다. 현재의 웅장한 성 베드로 성당도 이후 바티칸을 재건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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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약탈

이런 수난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로마를 점령하면서 다시 재현되었다. 파리까지 끌려가 강제로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참여해야만 했던 교황 피우스 7세는 자신의 눈 앞에서 수많은 고대 유물과 예술 작품이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약탈되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벨베데레의 아폴론>, <라오콘> 등이 모두 파리로 실려갔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약탈해 온 작품들을 루브르에 전시하고 새로 맞이한 오스트리아 황비 마리 루이즈와 함께 찾아와 즐기곤 했다.

나폴레옹이 쫓겨나고 나서 이 유물들은 대부분 다시 바티칸으로 되돌아왔고, 되찾은 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교황은 당시 최고의 조각가인 안토니오 카노바에게 새로운 박물관을 짓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키아라몬티관이다. 바티칸 박물관에 속해 있는 이곳에는 천여 점이 넘는 걸작 조각들이 소장되어 있다. 


로마에서 약탈해 온 라오콘을 감상하기 위해 모인 나폴레옹과 사람들을 묘사한 판화


라테라노 협정을 표현한 당시 한 독일 잡지의 표지 삽화

T  A  K  E    F  I  V  E

라테라노 협정, 무솔리니와 손을 잡은 교황

1917년 러시아 공산 혁명이 일어나고 1929년에는 뉴욕 월 스트리트의 주식시장 붕괴로 인해 경제 공황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다.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서 극우 독재자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자 약 1세기 이상 끌어오던 통일 이탈리아와 바티칸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초라한 신세로 전락한 바티칸은 결국 이탈리아와 라테라노 협정을 맺게 된다. 많은 이들이 파시스트와 결탁했다고 당시 교황 피우스 11세를 비난했지만, 그로서도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바로 이 협정을 통해 인구 천 명의 바티칸 시국이 탄생했으며, 교황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인구를 지닌 소국 바티칸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이 협정을 통해 권력의 합법성을 공인 받은 무솔리니는 이를 기리기 위해 성 베드로 성당으로 이어지는 비아 델라 콘칠리아지오네Via della Conciliazione, 즉‘화해의 길’을 조성한다. 무솔리니에게 화해를 의미했던 이 길은 바티칸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굴욕의 길’로 남아있다.

THEME > 베르니니가 없었다면

THE MASTER OF ROMAN BAROQUE


PHOTO_ <4대 강 분수>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 1648-1651, 대리석, 로마 나보나 광장

도시 전체가 베르니니의 작품

17세기는 미술사에서 흔히 바로크 시대로 불린다. 포르투갈 어로‘찌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이 말은 원래는 보석 세공사들이 쓰던 용어였다. 처음에는 미학적 규범을 벗어난 괴이한 작품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19세기 후반 미술사가들에 의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이상적인 미를 추구하는 고전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는 바로크의 최대 대가다. 그가 아니었다면, 로마는 밋밋한 도시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성 베드로 성당과 광장을 완성한 인물로, 바티칸만이 아니라 로마 곳곳에 그의 작품들이 흩어져 있어서‘바로크 로마’ 는 베르니니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나보나 광장의 분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의 <성녀 테레사의 신비 체험> 등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연극적인 구성과 인물들의 움직임을 강조한 역동적인 묘사, 이를 통해 초자연적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미학적 효과 등이 바로크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베르니니의 작품에서 바로크의 이 모든 특징들이 구현된다.


PHOTO_ <성녀 테라사의 신비 체험>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 1647-1652, 대리석,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교황 우르바누스 8세 기념조각>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 1627-1647, 도금 청동, 대리석성 베드로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교황 알렉산드르 7세 기념조각>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 1671-1678, 대리석성 베드로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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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대가, 베르니니

이런 이유로 베르니니는 반종교개혁의 선봉에 선 예술가였다. 루터와 칼뱅이 일으킨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교황권을 위협한 가장 큰 사건이었다. 교황들은 순수 복음에 위배된다며 모든 성상화를 금지한 이 프로테스탄티즘에 맞서 건축, 성화, 조각을 통해 초자연적인 기독교의 신비를 나타내고 자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미술 사조가 바로크였고, 그 대가가 바로 베르니니였던 것이다.

바티칸에서 베르니니의 작품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수도 엄청나다. 성 베드로 성당 내부에서는 제단 이외에도, 교황 우르바누스 8세 기념조각, 교황 알렉산드르 7세 기념조각 등이 베르니니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성당의 궁륭을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에는 한 손으 로 긴 창을 들고 있는 성 롱기노스의 조각이 있는데, 이것 또한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성 롱기노스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었을 때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를 흘리게 한 로마 병사로 후일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당시 쓰인 창은 성유물로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 1670, 대리석성 베드로 성당 입구 오른쪽 (Basilica di San Pietro)


<샤를마뉴 황제> 아고스티노 코르나치니(1683-1754), 1725, 청동성 베드로 성당 입구 왼쪽 (Basilica di San Pie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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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상에 표현된 바로크적 특징

베르니니의 바로크적 특징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작품은 성 베드로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입구 오른쪽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상이다. 1670년 72살의 늙은 몸으로 제작한 작품이지만, 젊은 조각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힘차고 위풍당당한 면모를 보여주는 기마상 이다. 특히 두 발을 쳐들고 포효하는 말 묘사는 베르니니 기마상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이 작품에서도 그 힘찬 모습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말의 꼬리와 갈기는 마치 신비한 힘에 이끌린 듯 생동감 넘치며,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역시 한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는 극적인 장면의 주인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을 건너편 아고스티노 코르나치니가 제작한 <사를마뉴 황제> 상과 비교해 보면 베르니니의 바로크적 특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역동적이고 초자연적인 분위기가 넘쳐나는 기마상으로 인해, 베르니니는 17세기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프랑스 궁정에 초대를 받아 태양왕 루이 14세의 기마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는 바로크를 인정하지 않던 고전주의 시대였고, 자연히 베르니니의 기마상은 루이 14세 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해 파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행히 다른 조각가가 말 위의 루이 14세를 그리스 신화 속의 다른 인물로 변형시켜 베르사유 궁에 보존한 덕에 오늘날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앞에 세워져 있는 기마상이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두 앞발을 치켜든 채로 포효하는 말 위에 루이 14세가 올라가 있다. 


PHOTO_베르니니가 제작한 성 베드로 광장의 열주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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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도시, 로마의 연출자

유럽인들에게는‘영원의 도시’이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무방비 도시’이기도 한 로마는 미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처럼 로마는‘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고대 로마에서 시작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르네상스를 거치고, 베르니니의 바로크로 이어진다. 결국 베르니니는 바로 이 ‘바로크 로마’의 연출자였던 셈이다.

THEME > 바티칸 정원

GIARDINI VATICANI


벨데레데 정원과 솔방울 정원

바티칸 정원은 무료 입장이 가능한 곳과 예약을 해야만 볼 수 있는 곳으로 나뉜다.

벨베데레 정원, 솔방울 정원 등은 무료 입장이 가능하며, 그 외의 관람은 미리 예약을 문의해야 한다. 예약 일정이 잡히면, 보통 2~3일 전에 성 베드로 광장 좌측의 관광안내소에서 티켓을 찾아야 한다


PHOTO_ 솔방울 정원의 청동 솔방울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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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레 정원Giardino del Belvedere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이 보여주는 위용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성당 뒤편의 벨베데레 정원이다. 벨베데레는‘좋은 전망’이라는 뜻으로, 옛날에 언덕 위에서 로마를 굽어볼 수 있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분수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선물한 기념물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24만㎡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벨베데레 정원은 아름다운 꽃들과 거대한 떡갈나무, 오래된 분수들로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작은 여름 별장도 있는데, 1560년 교황 피우스 4세를 위해 건축한 것이다. 정원에는 중세 요새의 흔적들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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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방울 정원Cortile della Pigna

솔방울 정원은 거대한 청동 솔방울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청동 솔방울은 서기 1세기경 과거의 성 베드로 성당에 있던 조각이다. 로마의 이시스 여신의 신전에 있던 조각을 가져다 놓았던 것인데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조각이다. 이시스 여신이 이집트의 신이었기 때문에 솔방울 앞뒤로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사자상과 기타 조각 들이 장식되어 있다.

솔방울로 올라가는 양방향 계단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솔방울을 감싸고 있는 반구형의 건물은 16세기에 세워진 것이고 솔방울 정원 한가운데 있는 황동으로 제작된 지름 4m의 커다란 구는 우주의 신비를 형상화한 이탈리아 현대 조각가 아르날도 포모도로의 작품인 <구 속의 구>이다. 이 정원 끝에는 피오 클레멘티노관이 있는데,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벨베데레의 안뜰에 <라오콘> 등 고대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테마로 보는 바티칸의 작품들 2

THEME > 미켈란젤로 때문에

OTHER MASTERPIECES IN SISTINE CHAPEL


미켈란젤로의 명성에 가려진 시스티나 성당의 걸작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과 정면의 벽에는 서구 회화사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미켈란젤 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당 안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 유명한 작품의 원본을 마주한다는 사실에 가슴 벅차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성당 양쪽 벽면에 그려진 다른 벽화들은 관심조차 끌지 못한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출중한 재능으로 주변의 시기와 질투에 시달렸던 미켈란젤로는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이 벽화를 그린 당대 최고의 화가들을 섭섭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외에도 <최후의 심판>을 중심으로 왼쪽 벽과 오른쪽 벽에 각각 ‘모세의 일생’ 과 ‘예수의 일생’을 주제로 한 벽화들이 6점씩 그려져 있다. 라파엘로의 스승이자, 당시 최고의 화가로 존경을 받았던 페루지노가 여러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작품들이다. 르네상스가 일어난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지방의 걸작들로서 미술사에서는 초기 르네상스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미술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들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진 비슷한 크기의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12점의 벽화 중 페루지노가 그린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처음에는 12점이 아니라 16점의 그림이 있었는데,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그려지면서 두 점이 지워졌고, 입구에 있던 두 점은 벽이 무너지면서 함께 사라졌다. 


<예수의 세례> 피에트로 페루지노(1445-1523), 1482, 프레스코화, 335x540cm 시스티나 성당 (Cappella Sis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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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일생 연작 중 <예수의 세례>

이 그림 역시 좌우대칭과 인물 군상에 대한 균형 잡힌 구도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초월적 비전과 자연 풍경의 조화는 상호 모순 되는 요소들이지만, 예수 일생에 관련된 여러 장면들이 한 화면에 등장하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는 가장 핵심적인 테마인 예수의 세례가 들어가 있다. 서정적이고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자연과 초자연의 공존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모세의 청년기>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 1482, 프레스코화, 348x558cm 시스티나 성당 (Cappella Sis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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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일생 중 <모세의 청년기>

성당의 왼편 벽을 장식하고 있는 연작 <모세의 일생>의 한 장면이다. 보티첼리는 한 화면에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여러 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다. 페루지노와 달리 보티첼리의 묘사는 사물들의 윤곽을 훨씬 중시하고 있으며, 굽이치는 듯한 곡선은 사물에 화려한 분위기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그림 중앙에 있는 두 여인은 옷 속에 비치는 몸매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으며,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우아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묘사는 3년 후에 그려질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티첼리는 한동안 신화화를 그리다가, 이후 세속적인 그림을 멀리하고 성화에만 몰두한다.


<최후의 만찬> 코지모 로셀리(1439-1507), 1481-1482, 프레스코화, 349x570cm 시스티나 성당 (Cappella Sis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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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일생 중 <최후의 만찬>

예수의 일생을 묘사한 그림들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벽화로 유명하지만, 비단 레오나르도만이 아니라 많은 화가들이 그린 성화의 한 장르였다. 같은 주제를 시대마다, 화가마다 다르게 묘사를 하곤 했는데, 코지모 로셀리의 <최후의 만찬> 역시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선, 예수가 살아있던 당시에는 빵과 포도주만 차려 놓고 초라한 방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만찬을 화가가 호화로운 궁정에 배치시키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띤다. 금박 장식의 화려한 기둥과 천장은 화가가 왕궁이나 대귀족의 저택을 모델로 삼았음을 일러 준다. 그림을 잘 보면, 식탁에 달랑 잔 하나만 놓여있고 아직 음식이 놓여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잔이 성배인데, 화가는 일부러 이 성배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는 달리 식탁에 아무것도 올려 놓지 않았다. 그림 중앙에 있는 큰 포도주 병들이 일러주듯이 그림 좌우에 서 있는 네 명의 하인들이 곧 음식을 차릴 것이다. 머리 위에 광배가 없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지만, 긴 수건을 목에 걸고 있거나 개가 앞발을 들고 아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좌우의 이 인물들이 하인임을 알 수 있다.

그림 중앙 하단에는 개와 고양이가 뼈다귀 하나를 놓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다투고 있다. 성스러운 성화에, 그것도 최후의 만찬이 진행되려는 순간에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고 있어서 어리둥절할 수도 있지만,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는 존재를 통해 영적 존재인 예수와 12사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짐승과 인간, 초월적 영적 존재의 세 위계가 한 그림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배경에 그려진 세 점의 작은 그림들도 흥미롭다. 세 벽화는 왼쪽에서부터 각각 골고다 언덕에서의 기도, 로마 병사들의 예수 체포, 십자가 처형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 이후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것이니, <최후의 만찬>과 이 세 그림의 시간 순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처럼 성화라는 장르에서는 종종 인간적인 시간 관념을 초월하곤 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예수를 팔아 넘기는 유다가 성배를 가운데 놓고 예수와 마주앉아 있다는 점이다. 그림 속 유다의 머리 위에 있는 광배는 납빛이고, 유다의 등 위로 작은 사탄이 올라탄 채 무언가를 귀에 속삭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묘사들에서 알 수 있듯이 르네상스 당시의 화가들은 그림을 즉흥적으로 그리지 않고, 오랜 숙고를 통해 작품 곳곳에 비유와 상징들을 배치함으로써 한 편의 서사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이곤 했다. 


<시험 받는 예수>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 1482                   

<베드로와 안드레의 소명>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1449-1494), 1480


<산상수훈> 코지모 로셀리(1439-1507), 피에로 디 코지모 (1462-1521), 1481     

<홍해의 기적> 코지모 로셀리(1439-1507), 1482


<율법을 받는 모세> 코지모 로셀리(1439-1507), 피에로 디 코지모(1462-1521), 1481-1482

<반란자의 처벌>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 1481-1482


<모세의 유언> 루카 시뇨렐리(1450-1523), 1482

<모세의 이집트 여행> 피에트로 페루지노(1445-1523), 1482

THEME > > 바티칸 박물관, 서구 예술의 원천

THE SOURCE OF EUROPEAN ART, VATICAN MUSEUM

바티칸 박물관이 특별한 이유

“예술가들은 혼자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참고하며 창조한다.”

20세기 프랑스 유명 소설가이자, 드골 정부의 문화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앙드레 말로가 한 말이다. 말로의 말대로,
미켈란젤로가 없는 로댕은 생각할 수 없으며, 밀레가 없었다면 반 고흐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곧 미술 작품의 양식이나 묘사 기법 혹은 주제마저도 순수하게 독창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미술사는 묘사 대상인 미와 기법, 양식과 주제들이 시대와 작가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어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티칸 박물관은 후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모델로 삼았던 작품들의 원형이 다수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이 점이 바티칸 박물관의 가장 큰 매력이자, 서구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들 가운데 바티칸 박물관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이다. 


PHOTO_ 베르사유에 있는 라오콘 조각 라오콘의 이미지를 활용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속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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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장르를 뛰어 넘어 이루어진 대가들의 만남, <라오콘>과 <최후의 심판>

<라오콘>은 1506년 로마에서 한 농부가 발견한 기원전 2세기경 작품이다. 두 마리의 왕뱀에게 물려 죽는 트로이의 제사장 라오콘과 두 아들을 묘사한 조각으로, 발견 당시부터 수많은 예술가들을 사로잡았고 이후 데생과 조각들을 통해 헤아릴 수 없이 모사 또는 복제되었다. 베르사유 궁의 정원에도 이 작품의 복제품이 있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 조각의 정수가 표현된 이 작품은 예술가들은 물론, 예술사가 빙켈만, 독일 비평가이자 극작가 레싱, 괴테 등에게 영향을 주어 미술사와 미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 역시 이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아, <최후의 심판>에서 거대한 뱀이 지옥의 심판자 미노스의 몸을 물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라오콘>의 장면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성기를 뱀에 물린 인물은 당시 미켈란젤로를 미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 교황에게 그림 수정을 요구했으나, 교황은 “신이 하신 심판을 내가 어떻게 고치겠는가.”라며 이를 거절했다.


<크니도스의 비너스> 대리석 모각 바티칸 박물관, 피오 클레멘티노관, 가면의 방 (Musei Vaticani, Museo Pio-Clementino, Gabinetto delle Maschere)


<비너스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 1485, 캔버스에 템페라, 172.5x278.5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앉아있는 여인 누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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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니도스의 비너스>와 보티첼리의 비너스, 모딜리아니의 나부들

<크니도스의 비너스>는 기원전 4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조각가인 프락시텔레스Praciteles가 제작한 작품이다. 바티칸에 있는 작품은 그리스 시대의 원본을 로마 시대에 모각한 것이다. 소아시아 크니도스의 신전에 놓여있던 작품인데, 그리스 조각사 최초의 누드 조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여인 조각의 최고 걸작으로 꼽힐 만큼 예술적 완성도도 뛰어나다. 묘사된 여인을 보면 한 발을 살짝 들고 다른 발에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며 허리를 비틀고 있는데, 이른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라고 하는 이 포즈는 프락시텔레스의 작품 이후 하나의 규범으로 정해졌다. 이 자세는 중세 천 년의 암흑기를 지나 보티첼리가 그린 르네상스 최초의 누드화 <비너스의 탄생>에서 다시 부활했고, 이후 회화와 조각 등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제작된 비너스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앵그르의 <샘>은 비너스의 이런 자세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으로 손꼽히며, 양손으로 각 각 음부와 가슴을 가리고 있는 포즈는 20세기 초 활동한 모딜리아니의 여인 누드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 <천지창조> 중‘아담의 창조’

<성 마태오의 소명> 카라바조(1571-1610), 1599-1600, 323x343cm,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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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와 카라바조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천장화인데다, 워낙 작품이 거대하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관람객들 때문에 그림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천지창조>의 장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영화 나 광고 등에 자주 사용되는 ‘아담의 창조’다. 신의 손과 아담의 손이 서로 만나는 장면이다. 아담의 코를 통해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성서의 내용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답게 손을 통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기를 전달하고 있는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약 100년 후 그려진 카라바조의 작품 <성 마태의 소명>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등장한다.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 산치오 라파엘로(1483-1520), 1504, 목판에 유채, 170x117cm, 개인 소장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페루지노의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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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지노와 라파엘로

르네상스는 한 시기에 수많은 천재들이 동시에 출현한 시기로, 이 같은 예술의 황금기는 고대 그리스 이후 역사상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 천재들이 군웅할거하던 때인지라 자연히 스승과 제자가 경쟁을 하기도 했고, 끊임없이 다른 예술가들과 어깨를 겨루어야 했다. 르네상스의 이런 청출어람 사제 관계 중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페루지노와 그의 제자 라파엘로이다.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페루지노의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와 밀라노에 있는 라파엘로의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을 나란히 놓고 보면, 스승이 제자에게 무엇을 가르쳤고, 제자가 그 과정을 통해 어떻게 스승을 능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의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 또한 거의 그대로 모방했는데,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인물 배치, 원근법의 적용 등이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라파엘로가 20살을 갓 넘긴 1504년에 그려진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은 화가의 청년기를 마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라파엘로는 그림 속 사원 정면에 "RAPHAEL URBINAS MDIIII"라고 적어 넣어, 처음으로 작품의 창작 연도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름을 노출시키지 않았던 과거의 작업 방식과 달리, 앞으로는 자신의 이름으로 창작을 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그림의 전체적인 구성은 스승 페루지노의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와 프랑스 캉 미술관에 있는 <동정녀의 결혼>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뒤에 보이는 사원과 계단, 광장을 중심으로 정확한 원근법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라파엘로는 황금빛 톤의 밝은 색을 많이 사용하고, 사원 뒤편에 광원을 두어 화면 속으로 빛을 끌어 들임으로써 그림에 선명함과 공간의 깊이를 동시에 부여하고 있다. 마리아의 아름다운 프로필과 황금색의 전체적인 톤은 기하학적 경직성을 띤 구도를 상쇄할 정도로 부드럽고 온화하다. 이에 반해 스승 페루지노의 그림은 온화함이나 색의 배치 등에서 제자의 작품보다 떨어진다. 배경이 되는 건물 묘사와 인물 배치에서도 라파엘로의 그림이 공간의 깊이감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인물 묘사의 유연성과 함축성도 라파엘로의 작품이 좀 더 뛰어나다. 라파엘로는 후일 이를 더욱 발전시켜, 자신의 최고 걸작인 <아테네 학당>을 그린다. 건물과 인간의 완벽한 조화, 원근법과 연극적 무대 구성, 시간을 초월해 영원하고 궁극적인 것에 대한 지적, 종교적 호기심 등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스승 페루지노의 가르침과 이를 능가하는 라파엘로의 재능으로 탄생한 걸작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테네 학당>이 서구 미술사에 끼친 지대한 영향은 페루지노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에는 페루지노와 라파엘로의 그림 여러 점이 함께 소장되어 있다. 

THEME > > 바티칸의 현대 성화들

THE MODERN RELIGIOUS PAINTINGS IN VATICAN


PHOTO_ 솔방울 정원에 있는 조각 <구 속의 구>

현대 기독교 예술 작품들이 한자리에

바티칸에 현대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놀랍게도 600여 점의 현대 예술의 걸작들이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선 실내에 있는 현대 성화들을 보기에 앞서 솔방울 정원에 있는 멋진 현대 조각을 보자.


PHOTO_ <구 속의 구> 아르날도 포모도로(1926-), 1990, 지름 200cm 바티칸 솔방울 정원 (Cortile della Pig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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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주와 소우주를 상징하는 현대 조각

바티칸의 솔방울 정원에 가면 황동으로 제작된 거대한 조각 작품인 <구 속의 구>를 볼 수 있다. 바티칸에서 수천 년 전 유물과 르네상스 시대 성 스러운 작품들을 대하던 사람들은 솔방울 정원에서 이 현대 조각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한다. 1990년 이탈리아 현대 조각가 아르날도 포모도로가 제작한 이 작품은 지름 4m의 큰 구 속에 작은 구가 들어가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작품의 의미는 추상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두 개의 구 중 외부의 큰 구는 만물의 창조주인 신이 만든 우주 전체를 상징하며, 내부의 작은 구는 인간이 사는 지구를 나타낸다. 수없이 많은 톱니바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구 속의 세계는 신비하면서도 정교해,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실체를 파악하기 불가능한 우주의 오묘함을 나타 내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조각의 매력은 햇빛을 받으면서 황동 구리의 곡면 깊은 곳에 푸른 하늘이 비칠 때 한껏 발휘된다.

서구에서는 옛날부터 대우주와 소우주를 구분해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해석하고 이해해 왔다. 여기서 대우주는 우주 그 자체, 소우주는 인간을 의미했다. 이런 우주관은 인체의 건강과 질병, 기질 등을 이해하는 데도 적용되었다. 가령 고대 그리스 의사인 히포크라테스는 체액을 혈액, 점액, 담즙, 흑담즙 등으로 구분하고 각 체액이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의 기질이 결정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흙, 물, 공기, 불로 이루어진 네 원소가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천하만물이 생성된다고 보았던 고대 그리스 우주관의 연장이었다.


<종교적 목각> 폴 고갱(1848-1903), 1892 바티칸 박물관, 보르지아관 (Musei Vaticani, Appartamento Borgia)

<사제> 에밀 놀데(1867-1956), 1939-1945 바티칸 박물관, 보르지아관 (Musei Vaticani, Appartamento Bor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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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화가들이 그린 성화들

이외에도 바티칸에는 약 600여 점에 달하는 현대 기독교 예술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영국 현대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습작>,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 르동의 <잔 다르크>, 조르주 루오의 <예수의 얼굴>, 폴 고갱의 <종교적 목각>, 에밀 놀데의 <사제>, 이탈리아 현대 화가이자 조각가 루치오 폰타나의 <마르티누스 4세> 상 등이 있다. 이 현대 예술품들은 1967년 교황인 바오로 6세가 시스티나 성당에 모인 현대 예술가들에게 간곡히 부탁해 수집한 작품들이다. 현대 성화들은 스페인 출신의 교황, 알렉산드르 6세 보르지아가 사용하던 방을 개조해 만든 보르지아관Appartamento Borgia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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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습작>

이 가운데 프란시스 베이컨의 1961년 작 <벨라스케스의 교황, 습작>은 특히 눈여겨볼 작품이다. 베이컨의 작품 중 하나인 <삼면화>가 최근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900억 원에 달하는 고가로 팔리면서 그의 이름이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베이컨의 그림을 구입한 사람은 러시아 석유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로,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첼시 구단주이기도 한 인물이다. 소더비에서 팔린 <삼면화>는 중세의 제단화 형식을 모방한 작품으로 스페인 17세기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을 패러디하면서 남긴 습작이다. 베이컨은 이 그림에서 교황 자체보다는 모종의‘기’를 묘사하고 있다. 신의 지상 대리자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교황의 카리스마 혹은 한 사람의 인격과 그에게 부여된 종교적 상징성 사이의 괴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비록 습작이긴 하지만, 마치 X선 촬영을 한 듯한 음화의 분위기를 통해 교황이라는 존재로부터 발산 되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포착하고 있다. 베이컨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인간의 관념이나 지적 능력이 아니라, 신체가 보여주는 원초적 리듬과 미세한 진동을 생명 현상의 한 요소로 파악해 표현하고 있다.


<잔 다르크> 오딜롱 르동(1840-1916) 바티칸 박물관, 보르지아관 (Musei Vaticani, Appartamento, Borgia)

<예수의 얼굴> 조르주 루오(1871-1958), 1946 바티칸 박물관, 보르지아관 (Musei Vaticani, Appartamento, Bor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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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딜롱 르동의 <잔 다르크>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의 <잔 다르크>도 현대 성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학에서 상징주의 운동이 일어나 한창일 당시, 르동은 이에 영향을 받아 불교, 그리스 신화 등을 소재로 상징주의 회화를 많이 그렸던 화가이다. 유화가 아닌 데생과 파스텔로 이루어진 이 그림에서, 잔 다르크는 신의 계시를 받아 18살의 평범한 시골 처녀에서 갑자기 영웅이 된 초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진지하고 사려 깊은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수에 찬 얼굴 표정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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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오의 <예수의 얼굴>

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의 <예수의 얼굴>도 놓치면 아까운 작품이다. ‘신이 죽은 시대’ 였던 20세기, 종교화를 고집한 거의 유일한 화가 루오의 그림에서는 가난한 어린 시절과 함께 표현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생계를 위해 견습공으로 일하며 익히게 된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전성기 때에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사는 창녀와 가난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내면과 사회의 악을 바라보는 경향을 보였으나 기독교에 귀의한 이후 많은 연작 형태의 성화를 그렸다. 굵고 힘찬 터치, 순수하고 강렬한 원색들의 원시성은 루오의 성화에서 엿볼 수 있는 특징인데,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예수의 얼굴>에도 이런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다.

THEME > >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의 수장, 교황

POPE, HEAD OF THE SMALLEST CITY IN THE WORLD


작지만 큰 나라, 바티칸이 지닌 고도의 상징성

국토 44만㎡, 인구 천 명의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다. 그중 반 이상인 25만㎡가 정원이며 나머지는 성 베드로 광장과 성당, 박물관, 교황궁 등으로 쓰이고 있다. 성 베드로 성당과 박물관은 일반인의 입장이 허용되는 곳이지만, 교황궁은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다. 약 3천 명의 외부 인력이 교황청 전반의 사무를 돌보는데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관료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스위스 용병으로 이루어진 근위대도 포함된다. 

하지만 바티칸 시국에서 국토 면적과 인구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실질적 으로는 전 세계 30만 개에 이르는 교구를 관장하는 교황이 집무를 보는 곳이자, 성 베드로 성당이 있는 곳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가 바티칸의 국민이며, 전 세계 성당들이 바티칸의 국토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상징성이 바티칸의 본질이며, 건축과 장식, 박물관의 많은 그림들 PHOTO_ 모두 이를 드러내는 고도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PHOTO_ 조명으로 불을 밝힌 성 베드로 성당의 돔과 조각들

PHOTO_ 신임 교황의 선출을 공표하고, 새 교황의 첫 번째 축복이 내려지는 성 베드로 성당의 내부 

T  A  K  E     O  N  E 

교회의 수장, 교황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지만, 로마 주교의 약칭이기도 하다.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12명의 사도 중 베드로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 반석을 뜻하는 그의 이름대로,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한 것이다. 그 후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하였고 그의 무덤 위에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성당을 세운다. 현재의 성 베드로 성당은 이 옛 성당을 허물고 16세기 다시 지은 것이다. 사도들이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던 초대 교회 시절에는 주교나 교황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이후 교회가 일정한 장소에 정주하게 되자 12사도들의 뒤를 이어 주교들이 정신적, 행정적 직분을 맡게 된다. 이때부터 교회 전체를 총괄 지휘하는 수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사도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로마 교회의 수장이 전체 기독교 교회의 수장이 된 것이다.

T  A  K  E     T  W  O 

교황의 역사

교황은 기독교 초기 몇 세기 동안 온갖 이단과 기독교를 박해하던 황제들의 음모에 대항하며 교황권을 수호했다. 중세 유럽에서 교황권은 점차 세속의 영역으로까지 그 권한을 확대해 나간다. 13세기 초, 이전까지의 황제 개입이 사라지고, 추기경단만이 교황 선출권을 갖게 되면서 교황권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다 16세기 촉발된 종교개혁으로 교황권은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로마 교황청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교황권도 축소되었고, 18세기 이후 교황의 세속권은 더욱 약해진다.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해인 1870년에는 많은 교황령이 이탈리아 령으로 돌아갔다. 그 뒤 1929년에 무솔리니의 파쇼 정권과의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면서 바티칸은 현재와 같이 작은 시국으로 독립하였고, 자동적으로 교황은 바티칸 공화국의 수반이 되었다. 이후 세속적 권력을 상실하며 종교적, 정신적 문제에서만 영향력을 갖게 된 교황은 초국가적인 입장에서 국제 문제, 윤리 문제, 사상 및 사회 문제를 지도하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 평화에 큰 기여를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베네딕투스 15세,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피우스 12세가 전쟁의 종결과 평화 회복을 위하여 진력했다. TV, 인터넷 등 대중 매체의 발달로 오늘날 교황은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높은 대중 스타가 되었으며, 지구촌의 많은 사안에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런 현상은 역대 교황들 중 가장 많은 나라를 방문했던 요한 바오로 2세 때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어디를 가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입을 맞추는 교황의 모습은 전 세계로 타전되었고, 그의 인기를 한층 높여주었다.


교황 선거를 위해 추기경단이 소집된 선거회의 장면을 묘사한 삽화

T  A  K  E     T  H  R  E  E 

교황 선거

현행 교회법에 의하면, 교황은 전임 교황이 죽은 후 15일 이내에 콘클라베Conclave라 불리는 추기경단이 소집되어 선거회의를 통해 선출된다. 추기경들은 추기경이 되는 순간부터 자동으로 교황 선거권을 갖는다. 원칙적으로 남자 가톨릭 신도에게는 누구나 피선거권이 있으나, 실제로는 1389년 보니파키우스 9세 이래 추기경만이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198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되기 전까지는 모두 이탈리아 인이었다. 투표에 참가하는 추기경들은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투표 장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일시 연금되며, 절대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 투표 개시 후 3일이 지나도 신임 교황이 선출되지 못하면 추기경들은 5일 동안 하루에 한 끼의 식사만 제공받게 되고, 음식도 물과 빵만 제공된다. 현재 시스티나 성당이 투표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투표는 하루에 두 번 행하며 참석한 추기경의 2/3를 넘는 수가 찬성표를 던지면 선출이 확정되고, 즉시 바티칸 위로 맑은 연기가 피어 오른다. 당선자가 취임을 수락하면 곧이어 추기경 중 한 명이 성 베드로 성당의 로지아로 불리는 발코니에서 라틴 어로 신임 교황 선출 사실을 공표한다. 이어 선출된 교황이 모습을 나타내고 첫 번째 축복을 내린다. 새 교황 명이 결정, 공시되고, 선거 직후의 일요일 이나 축일에 대관식을 거행한다.


PHOTO_ 화려한 복장의 바티칸 스위스 근위대

T  A  K  E    F  O  U  R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

바티칸 스위스 근위대는 1506년 1월 21일,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에 의해 창설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나 스페인 병사들에 비해 키가 크고 체격이 장대하다는 점이 스위스 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었다. 때문에 유럽의 모든 군주들이 스위스 근위대를 고용하고 싶어했지만, 그 경비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근위대 선발은 엄격한 기준에 의해 행해진다. 신장 175cm 이상, 나이 30세 이하만 지원 가능하며, 스위스에서 군 복무를 한 경력이 있어야만 한다. 근위대 인원은 총 100명으로, 일반 사병 70명과 하사관 23명, 사관 4명, 고수 2명, 근위대장인 대령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사병이 드는 도끼 창은 길이 2m에 무게가 6kg 에 이른다. 근위대들이 입는 화려한 옷을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화려함이 특징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 산치오 라파엘로(1483-1520), 1511, 목판에 유채, 108.7x81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PHOTO_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2005년 교황 자리에 오른 베네딕토 16세

T  A  K  E     F  I  V  E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은 에어포스 원을 탄다. 다국적 기업의 총수들도 전용기를 갖고 있다. 이들은 신변안전과 바쁜 일정 때문에 전용기를 이용할 뿐, 팔자 좋은 제트족은 아니다. 전용기를 갖고 있는 대통령이나 기업 총수보다 더 바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교황이다.

물론 모든 교황이 다 바쁜 것은 아니다. 교황도 교황 나름, 칩거형부터 유물 수집형, 독서광형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전임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는 대통령이나 기업 총수들보다 더 바쁘게 전 세계를 왔다 갔다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84년 5월과 1989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방한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여행을 상당히 즐겼으며, 여러 번 바티칸을 빠져나가 몰래 스키를 즐길 만큼 스포츠광이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7년간의 재임기간 중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을 외국에서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한‘여행’의 차원이 아니라, 언제나 가야만 하는 곳에 갔고,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또한 어느 나라를 방문하든 가기 전에 늘 철저하게 준비를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을 찾았을 때도“벗이 있어 먼 데로 찾아가면 그야말로 큰 기쁨이 아닌가.”라고 첫 연설을 시작했다. 논어에 나오는 이 말을 그것도 한국어로 한 것이다. 모국어인 폴란드 어는 물론이고, 라틴 어, 영어, 프랑스 어, 독일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했던 교황은 이에 덧붙여 자신이 방문하는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그 말로 첫 축복을 내리곤 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언어를 존중하는 이러한 태도는 겸손과 예의를 갖춘 것이어서 더욱 큰 감동을 주곤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비행기에서 내리면 땅에 입을 맞추고, 미리 익힌 그 나라의 언어로 인사를 하는 교황은 전 세계 모든 인간을 상대로 목자로서의 직분을 다 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한 인물이었다.


PHOTO_ 성 베드로 성당에 모인 교황과 사제들 / PHOTO_ 교황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인터밀란 축구 선수들

T  A  K  E     S  I  X

빨간 구두를 신은 교황, 존 레논과 마돈나를 누르다

21세기의 교황은 대중스타를 능가한다. 패션 감각이 뛰어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빨간 구두를 신었다가, 여인들로부터“프라다 아니냐”는 질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교황청의 공식 해명. “악마는 프라다를 입지만, 교황은 아닙니다.”

비틀스 멤버였던 존 레논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1966년, “비틀스가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면서“기독교와 로큰롤 중 어느 것이 먼저 지구상 에서 사라질 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라고 헛소리를 한 적이 있다. 2006년 교황청은 레논의 이 발언을 정식으로 사면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1980년 겨울, 뉴욕의 아파트에서 스토커에 의해 살해된 탓에 사면을 받을 수 없는 처지다. 교황청은 이후 마돈나의 공격에도 의연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마돈나가 한창 혈기왕성하던 1989년, 그녀는 자신의 뮤직 비디오에서 십자가를 불태우고 예수를 유혹하는 막달라 마리아로 등장했다. 교황은 이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고, 먼저 무릎을 꿇은 쪽은 결국 마돈나였다. 2006년 자신의 히트곡 “라이크 어 버진Like a Virgin”을 교황에게 바친 다고 공개선언을 했는데, 마돈나가 정말 마돈나가 된 것일까?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을 했다는‘아니면 말고 식’의 <다빈치 코드> 역시 교황청의 분노를 샀지만, 교황은 허술한 소설과 그보다 더 허술한 영화를 선전하려는 술책에 말려들지는 않았다.

T  A  K  E     S  E  V  E  N

힘없는 이들과 늘 함께 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스포츠를 좋아해 스키 탈출을 감행하기도 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밀레니엄 마라톤에서 손수 출발 총성을 울리기도 했다. 또한 인터 밀란 등 로마 축구 리그의 세리에 A 우승팀을 빼놓지 않고 접견하곤 했다. 교황은 축구 선수들의 손을 잡아주고 축복을 내리면서 그라운드에 직접 나가 축구 관전을 하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교황은 일년 365일의 대부분을 가난 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는 데 할애했다. 로마 주교이기도 한 교황은 로마 소재 소교구를 찾아가 직접 미사를 집전하곤 했고, 교황청의 서기와 열쇠공의 결혼 미사에서 직접 주례를 맡기도 했다. 성탄절이면 로마의 어린 학생들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으로 초청하여, 말 구유에 들어있는 아기 예수 인형을 직접 나누어주는 등 다정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5년 교황이 선종하자 모든 세계인들이 그의 죽음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키를 타기 위해 수차례 교황청 탈출을 했던 천진난만함, 방문하는 나라의 땅에 입을 맞추고 그 나라 말로 첫 인사를 하는 예의와 배려, 축구 선수부터 어린아이까지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보여준 포용력, 그리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섰던 성자로서의 모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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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01 - 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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